적산(敵産) 불하와 농지 개혁

정재형/한경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 2010년 01월호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 경제는 식민 지배 하에서의 왜곡되고 기형적인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경제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해방 이후 새로운 출발점에 선 한국 경제가 이용할 수 있는 물적 자원은 크게 토지와 일본 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자산〔적산(敵産) 또는 귀속재산이라 불렸음〕, 그리고 미국의 원조물자 세 가지였다. 해방 공간의 한국 경제에서 중요한 계기 역시 농지 개혁과 적산 불하, 원조물자의 배분이었다.


 귀속재산 불하, 한국 현대 자본주의 시발점
해방 이후 적산 불하는 이승만 정부 출범 이전에 미 군정에 의해 이미 시작됐다. 그 방향과 내용에서 미 군정의 정책이나 이승만 정부의 정책 간 차이는 별로 없었다. 적산, 즉 귀속 재산이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본인들이 한국에 진출해 축적해 놓은 재산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토지와 가옥 등도 포함돼 있지만, 특히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에 남겨진 많은 사업체들은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사용돼야 할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미 군정은 한국 내에 있던 모든 일본인 재산은 미 군정 소유로 귀속된다고 선포했다. 모든 귀속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미 군정에 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소유권을 부정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에 의한 소유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미 군정에 의해 귀속 사업체의 관리인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주주, 관련 상인, 상공업자, 기술자, 미 군정 관리, 일제시대 관리 등 다양했다. 중소기업의 경우 대체로 일본인 소유자가 재산관리를 위임했던 사람 등 연고자가 관리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대기업에서는 외부에서 관리인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귀속 사업체 불하는 1947년부터 시작됐다. 미 군정이 포고한 원칙에 의하면 불하 대상 업체의 자산평가는 1945년 6월 장부 상에 표시된 가격에 의하고 불하방법은 일반 경매나 비공개 입찰 방식에 따르며, 1인당 1개 사업체 이상을 불하받을 수 없도록 했다. 다만, 미 군정 하에서 불하된 사업체는 대부분 중소 규모 이하였고 그 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다수 귀속 사업체의 불하는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에 이관된 후인 1948년부터 다시 시작됐다.
귀속 사업체 불하 조건은 매각 대금의 최소 20%를 계약금으로 납부하고 잔액은 연리 7푼(7%)으로 10년간 분할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조건은 거의 무상이나 다름없었다. 불하 대상자는 관리인이나 주주 등 이해 관계자들이 우선적으로 선정됐다. 또 대규모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기 위해서는 담당 관료나 정치가들과의 유착이 당연히 이뤄졌다. 한국 경제에서 정경유착의 전통은 멀리 일제강점기의 친일 자산가들에까지 거슬러 갈 수 있지만 해방 후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때다.
해방 후 민간에게 불하된 기업들은 총 2,700개였는데 이 중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는 기업은 40~50개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귀속기업을 불하받아 대기업으로 성장한 주요 사례는 SK그룹(최종건, 선경직물),  한화그룹(김종희, 조선유지 인천공장), 두산그룹(박두병, 소화기린맥주), 쌍용그룹(김성곤, 동경방직, 조선직물), 해태그룹(민후식 등, 영강제과), 동양그룹(이양구, 소야전시멘트 삼척공장) 등이다. 은행 주식의 민간 불하도 1956년 마지막으로 실시됐다. 삼성물산의 이병철은 우리은행(옛 흥업은행) 주식 85%와 조흥은행(2003년 신한은행에 인수됨) 주식 50%를 확보했다. 제일은행(옛 한국저축은행)은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됐고 대한양회의 이정림은 이를 계기로 1959년 서울은행을 창립했다.


 농지 개혁
농지 개혁이란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라 전근대적인 지주-소작제를 척결하고 토지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한편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농지 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농민들의 요구가 크기도 했지만 그보다 북한에서 이미 1946년에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 개혁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남한의 조속한 정치적ㆍ사회적 안정을 바란 미국의 압력이 가해짐에 따라 이승만 정부도 토지 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주 계급의 반대와 집권당인 한민당 세력의 소극적 태도로 실제 농지개혁법이 공포, 발효된 것은 1949년 6월이었다.
논밭을 제외한 과수원, 임야 등은 개혁 대상이 아니었고 개혁 방법으로 ‘유상매상, 유상분배’를 택했다. 해방 당시 한 가구당 평균 경작농지면적은 1.078헥타르였는데 농지개혁법에서는 농지 소유 상한선을 3헥타르로 정했다. 국가가 지주로부터 구입한 농지를 농민에게 소작을 주고 농민이 1년 수확량의 30%를 5년간 국가에 현물로 내면 소작 농지를 농민의 소유로 전환시켜 준다는 조건이었다.
농지 개혁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둘로 나뉜다. 농민들이 최소한의 농지를 확보할 수 있게 돼 농업생산성이 향상됐고 농가의 실질소득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로 인해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돼 농촌 자녀교육의 확대가 가능해 문맹률이 크게 낮아졌고, 이후 진행된 산업화 시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농지 소유 상한선으로 농업이 영세화됐고 기업농이 성장할 수 있는 싹이 틀 수 없어서 농업경쟁력을 약화시켰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 지가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데다 지가보상비 대부분이 지주들의 생활비로 사용돼 지주들이 산업 자본가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지주 계급의 해체가 잠재적인 개발 저항세력을 미리 제거했다는 점에서 역시 경제 개발의 추진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참고문헌>
· 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 (석혜원, 미래의 창)
· 뜻으로 읽는 한국경제사 (경제교육연구회 공저, 시그마프레스)
· 대한민국 기업사 (김두겸 이영훈 이한구 외, 중앙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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