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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
미술관에서 어쩐지 머뭇대는 사람들에게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에세이스트 2019년 09월호


미술관에 들어설 때면 늘 설렌다. 종이 위에 글씨라는 시각적으로 다소 제한된 형식의 책이 머리를 거쳐 심장을 울린다면, 화폭 위에 펼쳐지는 다채로운 세계는 눈을 통해 바로 심장으로 흘러간다. 주변이 어수선해도 그림과 눈을 맞추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문을 닫고 오직 그 그림과 나만이 존재하는 방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림이 조용히 스몄다. 하지만 미술관을 나설 때면 늘 풀다만 문제들을 남겨놓고 온 것 같아서, 풀어야 할 숙제들을 받아온 것 같아서, 개운치만은 않았다. 감상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그래도 내가 이 그림을 제대로 본 게 맞을까?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 화가와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 미술사조에 관해 벼락치기 공부를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림 앞에서 설레는 한편으로 자신이 없었고 살짝 어색했고 조금 불안했다. 그림들 앞에서 자주 낯을 가렸다.
이런 나에게 김수정의 그림 에세이 「그림의 눈빛」은 빛으로 다가왔다. 저자의 시선은 거의 없이 미술사적 정보들을 나열하거나, 그런 정보는 거의 없이 저자의 감상만 가득 나열하는, 그림 에세이가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들을 이 책은 완전히 비껴간다. 작품 속 세계와 그 작품을 그린 화가의 삶 위에 자신의 일상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포개어 읽어나가는 김수정의 눈빛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처럼 그의 눈빛 또한 마음에 스민다. 그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림을 통해 나의 마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마음을 통해 타인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여러 개의 눈빛들이 마음에 생긴다. 그는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병마와 싸우면서도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던 화가 슈테판 루키안과 그의 그림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화가의 병약한 몸은 지쳐갔지만 화가의 다정한 시선은 지치지 않았다. 〈머리 감기기〉는 그런 화가의 시선이 만든 포근한 실내 풍경이다. 끝없는 사랑의 시선은 사랑의 대상 위에 붓질처럼 쌓인다. 그리고 싶은 것이 많은 화가는 호락호락 무너질 수 없었다. - p.95

이것은 바로 김수정이 그림과 인간에, 일상 구석구석에 보내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의 시선은 어찌나 다정하고 섬세한지, 에밀 클라우스의 그림 〈건초 만드는 사람〉에 그려진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건초 더미를 힘겹게 등에 지고 위태위태하게 걷는 소녀를 보며, 그 그림 속 빛과 그림자의 방향까지 꼼꼼히 살핀 후 “그나마 뜨거운 햇살이 역광이니 다행이다. 순광이었다면 얼굴을 때리는 햇볕이 뜨겁거나 눈이 부셔서(…) 좀 더 움츠러들었을 테니 말이다”라며 조용한 한숨을 내쉰다. 그 유명한 고흐의 그림 〈구두 한 켤레〉 역시 그녀의 눈빛을 거치면 이렇게 애틋해진다.
다 닳아빠진 구두 끈이 흐트러져 아무렇게나 뒹구는 이 구두의 주인 앞에 나는 무너지고야 만다. 머리를 숙이고 구두 끈을 묶어주고픈 뜨거움을 주체할 수 없다. - p.224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여러 개의 눈빛들이 생겨나서 그런지 내 주변 풍경의 조도가 달라진다. 일상에서 ‘그림 같은 순간’들이 자주 포착된다. 당장 미술관에 달려가고 싶어진다. 나만의 ‘그림 일기’ 쓰기를 시작하고 싶어진다. 김수정의 전작 「그림은 마음에 남아」를 다시 찬찬히 읽게 된다. 그의 다음 책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그가 프롤로그에서 “어느덧 그림 그리는 일보다 글 쓰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라고 말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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