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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고탄 맞춤법
존중하는 원칙을 존중합니다
박태하 출판편집자, 작가 2019년 10월호


지난 9월 초, 대한민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조지아와 평가전을 치렀다. 조지아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 이 나라와는 전혀 무관한 캔 커피 브랜드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고, 옛 소련의 공화국 중 하나라는 사실이나 스탈린의 고향임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고, 의외로 기가 막힌 와인을 만들어내는 나라라는 사실을 아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직업병이 있는지라, 러시아라면 치가 떨렸던 이 나라 사람들이 러시아어에서 유래한 애초의 국호 ‘Gruziya’를 영어식인 ‘Georgia’로 바꿨다는 사실, 대한민국 외교부에도 공식 요청해 한글 표기도 ‘그루지야’에서 ‘조지아’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항상 떠오르곤 한다.
이번 호에는 ‘외래어 표기법’ 이야기를 좀 해보자. 띄어쓰기와 마찬가지로 외래어 표기법도 넓은 의미의 맞춤법에 엄연히 포함되니까.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는 여러 나라의 여러 철자를 한글로 어떻게 옮기는지가 시시콜콜 적혀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작 규정에는 쓰여 있지 않은 대전제, 즉 “가능한 한 현지어의 발음을 따른다”라는 명제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영어나 한자식 발음을 읽은 표기도 많이 썼다. 베니스, 비엔나, 불란서, 동경, 천진 등등. 하지만 요즘은 그 나라 말의 발음대로 읽은 표기를 존중해 베네치아, 빈, 프랑스, 도쿄, 톈진으로 적는 것이 추세. 사람 이름도 진작 이렇게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역적이 된 ‘호날두’는 ‘Ronaldo’를 포르투갈어로 읽은 것이고 2002년 한일월드컵 득점왕 ‘호나우두’는 같은 철자를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로 읽은 것이다. ‘Daniel’이 독일 사람이면 ‘다니엘’, 영어권 사람이면 ‘대니얼’이 되는 것도 이 때문.
이 원칙은 고유명사가 아니더라도 적용된다. 어원을 가진 언어의 발음이 우선하는 것이다. ‘ideology’와 ‘allergy’는 독일어가 어원이라 ‘아이디얼러지’와 ‘앨러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알레르기’가 되고, ‘déjà vu’와 ‘bourgeois’는 프랑스어가 어원이라 ‘데자부’와 ‘바워조이스’가 아니라 ‘데자뷔’와 ‘부르주아’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 규정은 이러한 대전제‘하’에(이때의 ‘하’는 붙이는 거 아시죠?!) 언어권별 표기 세칙을 규정해놓고 있다.
솔직히 편집자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규정이긴 하다. 이 인간이 어느 나라 인간인지를 일일이 따져야 하니 말이다. 말이 쉽지, 스위스 사람은 프랑스어권 출신인지 독일어권 출신인지도 따져야 하고 ‘파키스탄 이민자 3세의 미국인’ 같은 경우에도 머리를 싸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어·원어 존중 원칙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건 타자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에 관해서라면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옳다는 믿음 때문이다. 다양한 언어를 품음으로써 언어 제국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작은 언어들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남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보다 더 상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불러 줘’밖에 없지 않을까. 바로 조지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조지아’라는 표기도 한국어의 영어 표기 규정에 맞춘 것이긴 하다.) 사람들이 인종, 성별, 종교, 장애 여부, 혼인 여부, 성적 취향 등으로 차별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다양한 언어가 억눌리지 않고 평등하게 제도에 기입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조지아, 아니 좋지 아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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