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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빠
공주놀음
유신재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2019년 10월호


지구인 가운데 디즈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쌍둥이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과 사랑에 빠졌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인어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미녀와 야수, 라푼젤…. 모두 눈 크고, 팔다리 길고, 발목까지 오는 긴 드레스를 입은 백인 여성들인데 쌍둥이들이 어떻게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가려내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동안 스마트폰과 유튜브를 최대한 멀리 해왔는데 어디서 정보를 습득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첫째는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벨(Belle)이 되기로 했다. 예전부터 첫째가 둘째보다 예쁜 옷,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등에 더 관심이 많았다. 둘째는 라푼젤을 골랐다. 원래 단추가 없고 헐렁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즐겨 입고 예쁜 것에는 별 관심 없던 아이였는데, 첫째가 캐릭터를 하나 고르니 자기도 골라야 된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벨이 되기로 마음먹은 첫째는 벨의 패션을 따르기로 했다. 벨의 캐릭터가 인쇄된 티셔츠 정도로 만족하면 참 좋겠지만, 첫째는 보다 근본적인 패션 콘셉트에 주목했다. 그래서 매일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두 벌뿐인 긴 치마를 일주일 내내 입을 수는 없으니 아침마다 분쟁이 생긴다. 하긴 지난해까지 같은 어린이집에 다녔던 옆 반 언니는 진짜 공주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일상복에 만족해주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마른 체형에 대한 선호도 생긴 것 같다. 거울을 보며 “뚱뚱해”라고 하거나, 어떤 옷은 “뚱뚱해 보여서 입기 싫어”라고 한다. 그렇다고 과자, 초콜릿, 사탕 등 군것질을 자제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참고로 쌍둥이들은 전혀 뚱뚱하지 않다. 첫째는 얼굴만 약간 통통하다).
옷 입는 취향이야 곧 또 바뀔 테니 지금만 잠깐 참으면 될 것 같다. 마른 체형에 대한 선호는 살찌는 것에 과도하게 예민해지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동화 속 공주들이 낡아빠진 성 역할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 신경 쓰인다. 예쁘고 착한 것 말고는 아무런 능력이 없어 왕자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공주로 쌍둥이들을 키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쌍둥이들이 여러 디즈니 캐릭터 중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캐릭터인 벨과 라푼젤을 선택한 건 작으나마 위안이다. 친구 딸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두 살 더 먹으면 공주와는 거리가 먼 뮬란 같은 캐릭터로 옮겨간다고 한다.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여성상을 캐릭터에 담아내는 디즈니의 노력이 새삼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벨과 라푼젤로 분한 쌍둥이들은 종종 나에게 왕자 역할을 요구한다.
“왕자, 이리 와봐”, “왕자, 목 말라 물 줘”, “왕자, 다리 아프니까 안아줘”.
왕자를 머슴처럼 부리는 걸 보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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