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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탁 트인 부석사에서 나를 만나다
차홍 헤어디자이너 2019년 10월호

2015년 아시아 대표로 싱가포르 패션위크 헤어쇼 진행 의뢰를 받았다. 유럽 대표와의 콜라보 무대였는데 유럽 대표로는 당시 프랑스에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던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갈렛이 초청됐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부활이라고 극찬받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조형미 있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아티스트로 유명했다. 자유 주제로 음악, 무대 구성, 디자인 등 모든 것을 연출하는 것인데 상대 디자이너가 워낙 화려하고 압도적인 스타일이라서 우리 팀이 미미해 보이지 않을까 우려됐다. 그렇다고 의미 없이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하는 것 또한 경쟁하는 것 같아 쇼를 코앞에 두고 몇 달을 고민했다. 그때 답답한 마음을 식힐 겸 읽은 책이 최순우 작가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이라는 구절을 만나고 무작정 영주 부석사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슴이 탁 트이는 부석사에서 느낀 것은 가장 나다운 것, 우리다운 것으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디자인은 오랜 시간 겹겹이 흐른 사람들의 사고와 역사에서 온 것이니, 우리도 무량수전처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디자인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나보다 한참 연배가 높고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프랑스 디자이너의 모습이 사라지고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팀원들과 밤을 세워가면서 ‘우리다운 건 무엇일까?’,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건 뭐지?’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니 기존에 세계적으로 오랜 전통처럼 행해지던 무대 구성, 의상, 워킹,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이 사라지고 우리만의 새로운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무대를 가지고 싱가포르에서 쇼를 진행했다. 그전에 당연시됐던 t자 워킹이나 현장에서 보여주던 두 가지 정도의 쇼 스타일이 아닌, 웨어러블한 스타일 20여가지를 짧은 시간에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콘셉트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형식에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내 맘이 편안하니 그 또한 나에게 무거움이 아니었다. 그렇게 쇼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서 연락이 왔다. 로레알 프로페셔널 파리가 뽑은 세계 9대 헤어디자이너에 선정됐고 곧 파리 『그라치아』 매거진에 기사가 배포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감격스러운 것은 그 이듬해 열린 세계적 무대에 초대받은 것이었다. 그 무대는 전 세계 60개국 대표 헤어디자이너들이 모이는 가장 큰 무대였는데 이곳에서 차홍만의 단독 헤어쇼를 맡아 달라는 연락이었다.
기쁜 마음에 어떻게 선정됐는지를 물으니, 싱가포르 쇼가 화제가 됐고 많은 사람에게 큰 영감을 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을 비우고 나를 들여다보면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이고 나 또한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는 그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어려운 문제에 빠질 때마다 그 해결을 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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