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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그곳은
천리마가 만리마로…속도전 집착하는 북한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년 11월호


백마를 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화제다. 지난 10월 16일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정은이 백두산에 백마를 타고 올랐다는 소식을 일제히 전하며 사진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이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등과 함께 눈 쌓인 백두산에서 백마를 탄 것은 이른바 ‘백두혈통’으로 여겨지는 김씨 일가의 세습통치에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이미지 연출이란 해석이 나온다.
최고지도자가 백마를 탄 건 북한 주민들에게 낯선 모습이 아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모두 백마를 탄 장면을 통해 ‘유일영도체계’인 북한에서 ‘수령’의 지위를 과시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집권 첫해인 2012년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을 영상으로 공개하며 김일성-김정일에 이은 북한의 통치자임을 드러냈다. 집권 8년 차에 다시 백두산 백마 타기 장면을 공개한 건 향후 북·미 협상이나 대북제재 국면에서 김 위원장이 중대한 결심을 할 것임을 예고했단 분석이다.
사실 북한 주민들에게 백마는 최고지도자의 이미지 형상뿐만 아니라 현실 생활 경제에서 깊이 각인돼 있다. 바로 ‘속도전’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동물로 백마가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 방문을 위해 순안국제공항에 내려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상징물이 바로 천리마 동상이다. 하루에 천리(약 400km)를 달리는 준마를 의미하는 천리마(千里馬)는 북한의 경제 현장이나 사회 각 부문에서 전개된 이른바 노력경쟁운동의 대명사가 됐다.  
천리마운동은 전후 복구 건설 시기인 1956년 12월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당시 수상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란 연설을 통해 주창했다. 한때 우리 귀에도 익숙했던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나 ‘새벽별 보기’ 등이 모두 천리마운동에서 파생된 노력경쟁운동이다. 천리마운동은 북한 사회와 경제 현장을 반세기 넘게 지배했다. 대중잡지 『천리마』가 등장하고 천리마구역·천리마작업반·천리마속도 같은 말이 넘쳐났다.
김정은 체제 들어 천리마는 만리마로 변신했다. 김 위원장은 2016년 5월 열린 제7차 당 대회에서 “10년을 1년으로 주름잡아 달리는 만리마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하면서 천리마보다 강력한 운동을 제시했다.
35살 젊은 통치자 김정은 위원장은 유독 속도전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집권 초기엔 ‘마식령 속도’라는 걸 들고 나왔는데, 강원도 원산 인근 마식령(馬息嶺) 지역에 12개의 슬로프를 가진 대규모 스키장을 불과 몇 달 만에 속성 건설한 데서 따왔다. 2013년 말 완공한 뒤 지금은 관광객 유치 실패로 흉물이 되면서 마식령 속도는 곧 잊혔다.
김정은 집권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속도전식 노력경쟁에 주민들은 무척 고단한 모양새다.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으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하면서 북한경제는 한계에 봉착하고 주민들의 삶은 더 쪼들리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무한 속도로 달릴 것을 채근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7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사정이 나아졌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결국 주민들은 스스로 장마당을 찾아 자력갱생의 길을 가고 있다. 평양과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우릴 먹여 살리는 건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란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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