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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선의 브랜드텔링
전설이 될 카메라
염승선 『애플은 왜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텔링에 집중했을까?』 저자 2020년 06월호


1865년 독일,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광학연구소에 입사한 에른스트 라이츠(Ernst Leitz)는 연구소에서 제작한 현미경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신임을 얻는다. 연구소 수장 프리드리히 벨틀레(Friedrich Belthle)는 이 재능 있는 기술자에게 함께 경영할 것을 제안했고 둘은 공동대표가 된다. 1869년 벨틀레가 사망하고 연구소의 이름은 에른스트 라이츠 광학연구소(Ernst Leitz Optische Werke)가 됐다.
그리고 1911년, 에른스트 라이츠 광학연구소에 독일 최고의 렌즈 제조사 칼 자이스(Carl Zeiss)에서 근무했던 서른둘의 현미경 기술자 오스카 바르낙(Oskar Barnack)이 입사하면서 ‘라이카’의 역사는 시작된다.

필요가 만들어낸 명품
선천적으로 몸이 병약했던 바르낙은 자이스에서 근무할 때부터 간직했던 꿈이 하나 있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그는 자신처럼 몸이 약한 사람도 편하게 들고 나가 마음껏 찍을 수 있는 휴대용 카메라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카메라는 본체만으로도 크고 무거워 부수적인 장비까지 합치면 장정도 들고 이동하기에 버거웠기 때문에 병약한 그에게 그 꿈은 더욱 절실했다. 휴대용 카메라를 만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이스 재직 당시 이를 회사에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거절했고 이후 혼자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한 그는 이직한 연구소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면 조그만 부품들을 자르고 조립하면서 자신이 쓸 사진기를 만들었다. 
마침내 1914년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카메라가 탄생했다. 바르낙은 젊은 나이에 자신의 분야를 개척해 큰 회사로 일궈낸 라이츠에게 존경을 표하듯 카메라에 ‘Ur–Leica(최초의 라이츠의 카메라)’라 이름 붙였다.
라이카가 대중에게 판매되기 시작한 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5년 4월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공개된 ‘라이카 I’부터였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발명품에다 만듦새가 좋아 비싼 가격임에도 1929년까지 총 1만5천대 이상이 판매된다. 바르낙의 손에서 부품 하나하나가 만들어졌듯 라이카는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마감까지 훌륭한 제품으로 정평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1912년 입사한 막스 베렉(Max Berek)이 만들어낸 렌즈는 다른 회사의 렌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 훗날 렌즈의 이름이 만든 이의 이름을 따라 ‘Elmax’로 바뀐다. 미니멀하고 유려하게 수제로 하나하나 꼼꼼히 만들어진 본체와 세계 최고 수준 렌즈의 조합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라이카만의 분위기를 가진 사진을 만들어내는 명품 카메라로 정평이 나기 시작했다. ‘라이카 II’에서 가장 완벽한 카메라라 불린 ‘라이카 M3’로 이어지는 동안 바르낙은 라이카를 들고 나가 거리의 풍경을 마음껏 찍었다. 명사들도 라이카를 사랑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오직 라이카만 들고 다니며 ‘결정적 순간’을 담았으며, 피카소는 자신이 그린 작품을 라이카로 다시 그려냈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며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것은 브랜드의 가치가 된다. 브랜드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필요부터 보이지 않는 욕망과 문제까지 늘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변하고 그에 따라 필요와 욕망, 문제도 함께 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지켜온 브랜드의 가치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변화일 수도 있다.

 

전설의 귀환
라이카에도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휴대성을 최우선으로 한 ‘RF(Range Finder)’ 방식에서 정점을 찍은 라이카의 기술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아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 방식에도 단점이 있었다. 찍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뷰파인더와 실제로 사진을 찍는 렌즈 사이에는 보이는 것에 오차가 있었다. 경쟁 브랜드들은 이런 단점을 파고들어 눈으로 보이는 대로 찍히는 ‘SLR(Single Lens Reflex)’ 방식을 더 깊이 연구했고 앞다퉈 대량으로 제품화해 출시했다. 수제 방식으로 만들어진 라이카보다 저렴하고 사진 찍기에 더 편리한 카메라로 대중화에 성공한 것이다. 경쟁사의 성장은 라이카의 퇴보로 이어졌고 카메라의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라이카는 점점 더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라이카는 바르낙이 만든 RF 방식과 디자인의 본질은 유지한 채 디지털화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한다. 필름카메라가 빚어내는 사진의 색감과 느낌은 그대로 재현하고 디지털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편리함을 더했다. 100여년 역사 속 라이카만으로 작품을 만들어낸 이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바로 그 카메라가 디지털카메라 ‘M’ 시리즈로 부활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카를 사랑하던 사람들과 라이카로 작품을 찍은 명장들을 추앙하던 이들은 고가의 수제 디지털카메라에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냈다. 라이카는 로드숍 매장을 갤러리 형태로 바꾸고 명장들의 사진을 순회 전시하며 카메라 마니아들의 쉼터이자 교육장이 돼갔다. 사진 전문가와 마니아층 사이에서 사랑받던 라이카는 고가의 제품도 마다하지 않는 럭셔리층으로까지 고객의 범주를 확대하며 경쟁 브랜드 사이를 비집고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전설이 귀환하는 것처럼.
어떤 브랜드를 찾는 사람들에겐 그 브랜드만을 찾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시대가 변하며 바뀌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필요와 욕구, 문제의 해결방법이지 브랜드의 본질이 아니다. 브랜드의 본질이 바뀌면 이제까지 브랜드를 사랑하던 이들의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이카는 그 본질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바꿔 기존의 고객을 만족시켰고 새로운 고객의 눈을 뜨게 했다. 바르낙이 그토록 원했던 필요가 어쩌면 라이카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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