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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
청춘이여, 길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오라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0년 07월호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여행할 때였다. 젊었을 때 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이국의 뒷골목을 하루 종일 쏘다녀도 힘든 줄 몰랐고, 먹은 거라곤 비스킷 한 봉이 다였어도 배고픈 줄 몰랐다. 아무리 낯선 행선지를 가더라도 무서운 줄도 몰랐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 또한 왕성해서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의 작은 몸짓을 읽어가며, 미세한 표정 변화를 느껴가며, 며칠씩 같이 지내도 즐겁기만 했다. ‘소통’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의외로 작을 수 있다는 깨달음은 그때의 경험을 통해 갖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했음은 물론이고 감수성도 한껏 예민해서 세상의 작은 일에도 크게 감동했고, 반대로 상처도 많이 받았다. 이른바 ‘청춘’의 시절이었다. 푸를 청(靑), 봄 춘(春), 만물이 푸른 봄날이라는 뜻의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싱그럽고 활기차며 건강한 시절을 이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의 청춘은 여행에 실려 시간의 저편으로 모두 떠내려가고 없다. 지금의 나는 조금의 이해타산도 없이 순수하게 감동하지 못하는 것 같고, 맥주 서너 캔으로 떨쳐버리지 못할 상처도 없을 것만 같으니. 예전만큼 감정이 다채롭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울림의 폭도 좁아지며 무디어간다. 가슴 한편의 빈자리에는 경미한 우울감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순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중년이 돼간다는 반증이리라.
촬영 현장에서 나를 밀접하게 도와주는 촬영팀은 대부분이 청춘을 보내고 있는 청년들이다.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철철 흘러넘치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어느덧 중년에 들어섰다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는다. 그들과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업무 외에도 일상적인 대화를 많이 나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그들의 고민, 즉 우리 사회의 현안인 청년 문제에 대한 귀동냥도 하게 된다. 실업 문제나 고용 불안, 저임금 구조, 주거 불안 같은 것들 말이다.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서 요즘 청년들이 느끼는 박탈감이나 피로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모양이다. 취업 경쟁을 뚫기 위해 과도한 스펙 경쟁을 해야 하고, 결혼마저도 경쟁해야 하는 시대 아니던가. 공부해서 직업을 갖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하는 것은 특별한 욕심도 아니고 그저 보편적인 삶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청년들이 지나친 경쟁을 치르는 동안 인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가 돼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혼주의자이며 고졸 학력에 머문 사람이라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지침은 가진 게 없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도 수많은 ‘불안’에 시달렸으니 “청춘은 다 그런 거야”라는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은 더욱더 없다. 그래도 이왕에 나도 청춘을 살아본 사람이니,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조심스럽게 한마디 거들자면 여행을 다녀오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말이리라. 여행이 너를 위로해줄 것이고, 용기를 북돋아줄 것이라고. 길 위에 선 청춘만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오래된 여행자가 경험해봐서 알고, 그러한 청춘들을 많이 봐서 안다고.
다행인 것은, 내가 애써 여행을 종용하지 않아도 요즘 청년들은 이미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것이다. 내가 청춘이었을 때도 여행이 적지 않게 붐이었지만, 그때하고는 또 다른 것 같다. 예전에는 여행이 사치에 가까운 일로 인식됐다면, 지금은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제법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촬영팀 후배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 여행을 가기로 한 기간과 겹친다며 제안을 거절하는 경우가 그렇다. 과거에는 선배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가 여행이 될 수는 없었다. 여행을 아예 취소하거나, 다른 이유를 둘러대거나 해야 했다. 모르긴 해도 여느 직장에서도 감지되는 변화일 것이다. 물론 아주 당당하게 여행을 이유로 들며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그런 후배들을 대할 때면 만감이 교차하는 게 사실이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세상이 변했어’라며 본전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런 후배들이 반갑다. 여행의 위상이 변한 것은 더 반갑고. 그리고 당부도 잊지 않는다. 앞으론 더욱더 당당하게 얘기하라고. 여행은 네 인생의 주체적 권리니까. 조금 적게 일하고, 적게 벌어도 괜찮으니 최선을 다해 더욱 길게 여행하고, 더욱 자주 여행하라고. 가서 세상을 더욱 많이 이해하고, 길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오라고. 여행의 최대 목적은 배움이나 교양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푸른 봄날을 마음껏 즐기다 오라고.
갈 길 바쁜 청년들에게 웬 악마의 유혹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충실하게 소비하라는 부추김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지 않던가. 장미도 함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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