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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
공부와 함께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0년 07월호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회사 업무나 진로 모색과는 전혀 관계없는 공부를 꾸준히 했었다. 첫 2년은 여성학이나 사학, 미학 같은 것들을 그때그때 관심사에 따라 공부했고, 그 모든 것의 뿌리가 결국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 나머지 2년은 철학 강의를 일주일에 한 번씩 들으러 다녔다. 평일, 그것도 금요일 저녁에 세 시간 넘게 하는 강의였는데 거의 빠지는 일이 없었고 바쁜 틈틈이 시간을 내 복습도 하고 관련된 철학책들도 찾아 읽으며 나름 열심이었다. 그에 관해 이렇게 몇 줄 회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감이 잔잔히 밀려들 정도로 무척 설레면서 평온했던 시간이었다.
몇 번을 읽어도 뜻을 잘 모르겠던 문장들이 점점 명징한 언어들로 바뀌어 머릿속에 쌓여가면서, 희미하기만 하던 세계에서 무지의 안개가 조금이나마 걷히며 드러나는 풍경을 발견할 때마다 어떤 환희에 사로잡혔다. 같이 공부하던 학우들이 종종 “모든 게 결국 다 연결돼 있어!”라고 내지르곤 했던 탄성처럼, 새롭게 알게 된 세계가 이전에 공부했던 세계와 의식의 지평에서 어느 순간 만날 때 어떤 경이를 느꼈다. 때로는 이 거대한 세계에서 실타래 한 올만큼의 이해도 뽑아 올리지 못한 채 답답한 날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런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소 ‘나 자신’과 ‘나 자신이 속한 일상 세계’에 지나치게 매몰되기 쉬운 시선을 바깥으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 기분과 비슷했다. 다 던져버리는 자유가 아닌 제대로 품어 안아보는 자유.
평론가 김인환의 산문집 『타인의 자유』를 읽으면서 그때의 희열이 되살아났다. 최근 2년간 이런저런 일에 치여 공부를 중단한 것을 깊이 후회했으며, 아무리 바빠도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평생을 열린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해온 노학자의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내면과 단정하면서도 겸손한 태도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시와 모던 팝, 과학기술과 정신분석 등을 횡으로 종으로 미끄러져가며 전체적인 맥락의 지도를 삶과(그리고 죽음과) 연결시켜 그려나가는, 깊으면서도 너른 사유가 담긴 이 책이야말로 ‘왜 우리는 계속 공부해야 하는가’에 관한 생생한 답이자 증거였다. 공부와 함께 단단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순과 복잡성을 이분법이나 ‘단순화된 신념’ 같은 손쉬운 도구로 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모순 그대로 견뎌내며 복잡한 회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그 너머를 고민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그런 단단함 속에 진정한 자유가 깃든다는 것을 『타인의 자유』를 읽으며 새삼 되새겼다.

현실은 현실에 대한 어떠한 표현보다도 더 크다. 그러나 경험이 독서보다 반드시 삶에 더 유효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데에 독서의 신비가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 필요 없는 것을 분명하게 한정할 수 없다. 장자는 필요 없는 것을 배제하고 필요한 것만 포섭하라는 혜자의 견해에 대하여, 발을 딛고 있는 땅은 서는 데 필요하고, 그 이외의 땅은 서는 데 필요 없다고 하여 나머지 땅을 다 잘라버린다면 땅을 딛고 서 있을 수도 없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 p.20

무더운 여름, 환희와 경이와 자유가 넘실대는 공부의 바다로 이 책을 타고 흘러들어가 보는 건 근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하던 공부를 중단한 사람도, 아직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필요 이외의 공부를 시작해본 적 없는 사람도, 이 책을 통해 공부하는 삶에 발을 담가보면 좋겠다. 그게 무엇이든. 모든 건 결국 다 연결돼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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