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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문장들
번역이라는 확장과 창조의 세계를 엿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0년 08월호



‘번역가’라는 존재를 처음 의식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당시 내가 읽는 책의 80퍼센트 정도는 번역서였는데, 특히 해문출판사에서 나오는 빨간 표지의 애거사 크리스티 시리즈에 푹 빠져 있었다. 좋은 번역이라는 게 어떤 건지 판별할 줄 아는 능력이 나에게 있었을 리는 없고 분명 책 내용의 재미에 따라 무턱대고 판단했을 텐데, “우와, 진짜 너무 재밌다! 최고다!” 하는 책의 표지를 보면 어김없이 ‘이가형 옮김’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책이 번역돼 나오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그저 “‘이가형 옮김’은 다 재미있다”라고 역시 무턱댄 결론을 내렸고, 애거사 크리스티 시리즈를 다 읽은 후에도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마다 ‘이가형’이라는 이름을 찾아보곤 했다.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라 표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수작업이 필요했는데 그러다가 ‘이가형 옮김’을 발견하면 탄성을 지르며 당장에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말로, 정말로 ‘이가형 옮김’들은 다 재미있었다.
20대 중반쯤에는 번역가가 되는 미래를 여러 진로 가능성 중 하나로 염두에 두고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판단을 내리기에 7개월은 다소 짧은 기간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마음속 리스트에서 번역가를 조용히 지웠다. 나에게는 여러모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쪽 언어에 관한 풍부한 이해와 상상력, 지식 등은 물론이고 굉장한 꼼꼼함과 끈질김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골고루 다 부족했지만 특히 용기가 부족했다. 일정 기간 동안(혹은 영원히) 이 텍스트가 한국어로서는 오직 내가 번역한 대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기에 단어 하나 선택하는 데도 벌벌 떨었다. 그때부터 번역가들을 더욱더 존경하게 됐고, 번역 관련 서적도 꽤 찾아 읽었다. 그중에서 번역이라는 엄중한 세계부터 번역가들의 일상까지를 모두 엿볼 수 있어 색다르면서도 인상적이었던 책은 내가 굉장히 신뢰하는 두 베테랑 번역가가 쓴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이다.

번역가들은 자신이 다루는 텍스트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는다.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끊임없이 그 텍스트를 생각한다. (…) 마음속으로 작가와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하며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 일어나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줄기차게 매달린다. - p.29

“문장 하나하나마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한” 그들의 끈질긴 분투와 용기를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가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전해주기 위해, 우리의 시야를 어떤 형태로든 확장시켜줄 한 세계를 창조해내기 위해 이렇게 온 힘과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나 역시도 나의 ‘일일’을 허투루 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까지 이어진다. 분명 번역과 관련한 책을 읽었는데 어떤 인생에 관한 책을 읽고 난 기분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사나이 소노코라는 또 한 명의 잊지 못할 번역가를 만났다. 나의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일본어로 옮겨준 번역가다. 일본어판 표지를 보면서 누군가의 커다란 분투와 용기로 이 책이 국경을 넘게 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이 아니었다면 이게 얼마나 경이롭고 뭉클한 일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옮김’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를 스쳐간, 때로는 관통한 많은 이름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옮김’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모든 세계의 ‘이어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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