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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의 신나는 시네
세상의 끝에서 삶의 반환점을 돌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2020년 10월호



제목이 <어디갔어, 버나뎃>이다. 제목이 영화의 내용을 유추하는 힌트라면, 극 중 버나뎃은 실종 상태인가 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버나뎃을 찾아 나서는 사연인가 보다. 심각한 분위기의 스릴러 영화라면 단서를 쫓아 버나뎃을 찾는 과정에 집중하겠지만,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리처드 링클레이터다.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3부작을 만들어 ‘삶은 현재진행형인 여행’에 비유했던 감독이다. 그러니까, <어디갔어, 버나뎃>은 인생의 좌표에 관해 묻는 영화라는 얘기다.

버나뎃 그는 누구인가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워커홀릭 남편을 둔 부인이다.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지원을 받아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둘 사이에는 딸이 있다. 버나뎃은 엄마라는 얘기다. 딸 비(엠마 넬슨)와는 아주 절친하다. 매일같이 학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집에도 함께 온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는 쑥덕거린다. 비 엄마가 말이지 쑥덕쑥덕, 엘진 부인이 말이지 쑥덕쑥덕, 하도 흉을 보는 통에 버나뎃은 심통이 났다.
‘마음의 통증 心疼’은 오래전부터 버나뎃을 괴롭혀왔다. 부인이고, 엄마이고, 이웃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버나뎃은 부인이 되기 전, 엄마가 되기 이전, 이웃이 되기 아주 오래전에 천재 건축가로 이름을 알렸다. 자신이 살집을 첨단으로 디자인해 건축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잘 나가는 듯했다. 근데 이 프로젝트를 강탈당하는 일을 겪으면서 버나뎃은 무너졌다. 주변과 대화를 끊고 건축 일도 포기하면서 스스로 고립됐다. 지금 사는 집도 저택이기는 해도 관리를 하지 않아 쓰레기장이 따로 없다. 지금 버나뎃의 마음속 풍경이 이 지경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뉴욕타임스가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무려 2년 넘게 이름을 올린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편지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와 FBI 서류 등의 문서 형식으로 구성돼 있어 독특하면서도, 복잡하면서도, 독자들의 편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면서도, 좋게는 마이웨이, 나쁘게는 고집불통의 인상을 준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데 <어디갔어, 버나뎃>의 구성은 버나뎃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읽기 쉽지 않은 책이 2년 넘게 베스트셀러 지위를 유지하고 전 세계 30여 개 국가에 출간되고 책의 인기로 부족해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건 버나뎃을 둘러싼 환경과 그에 영향받은 버나뎃의 반응과 그럼으로써 변화해가는 버나뎃의 모습이 독자에게, 영화팬에게 주는 울림이 있기 때문일 터다. 천재는 아니지만, 건축가는 아니지만, 저택에 사는 건 아니지만, 나 또한, 너 또한, 우리 또한, 버나뎃과 비슷한 고민과 갈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깨달음이 나의 상황과 너의 현재와 우리의 지금과 닮아 있어서다.

버나뎃은 어디에 있는가
가족 외에 말을 섞지 않는 버나뎃이 물건을 사고, 세금을 내고, 사무를 처리하는 건 온라인 비서를 통해서다. 버나뎃이 말하는 걸 듣기만 하고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는 온라인 비서 덕에 버나뎃은 겨우 세상과 소통한다. 아니, 소통하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온라인 비서는 러시아에서 미국의 정보를 캐기 위해 비밀리에 작업한 프로그램이다. 이를 눈치챈 FBI는 버나뎃과 러시아와의 유착 관계를 추궁한다. 남편 엘진은 심각성을 인지하고 버나뎃에게 너 지금 마음이 아프다고,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다그치자 그 길로 버나뎃은 사라진다.
어디갔어, 버나뎃? 크릴새우가 서식하고 고래가 헤엄치며 펭귄이 무리 지어 사는 남극으로 갔다. 둥근 지구의 극점, 세상의 끝, 가족마저 뒤로 한 채 문자 그대로 홀로 된 버나뎃이 인생의 절벽에서 세상을 보니 예상한 것과 다르다. 이제 끝, 추락만이 유일한 선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라 반환점이라고 생각하니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지구는 둥그니까 남극을 반환점 삼아 자꾸 걸어 나가면 돌아온 길을 다시 마주하게 되니, 거기에는 건축가로 이름을 날렸던 시절의 희열이 다시 현재형으로 버나뎃을 기다리고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10대 소년이 20대로 성장하는 <보이후드>(2014)를 만들었다. <비포 선라이즈>의 20대 남녀는 여행지에서 만나 마음을 통한 뒤 9년 지나 <비포 선셋>에서 재회,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에서 부부가 되어 중년의 위기를 겪었다. 이 네 편을 하나로 엮으면 인생의 첫 번째 챕터가 된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삶의 전반기를 마무리한 버나뎃의 방황과 이의 극복을 다뤘다. 그럼으로써 이어질 두 번째 ‘보이후드’,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한 버나뎃에게는 이후 어떤 ‘비포’ 시리즈가 기다리고 있을까.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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