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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의 시간을 달래줄 유익하고 재밌는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0년 10월호


코로나19 2차 확산으로 다시 집에 틀어박히는 시기가 도래했다. 지난 1차 확산 때도 두 달 남짓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자전거 몸체 길이+자전거 간 유지하는 안전거리’만큼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것이 유일한 야외활동이었다. 신기한 점은, 예년에 비해 외부활동량이 압도적으로 줄었으니 거기에 썼던 만큼의 에너지가 비축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꾹 참고 안 하기’에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었고, 코로나19가 만들어내는 불안감(감염의 두려움부터 미래에 대한 막막함까지)이 더해지면서, 가만히 있는데도 에너지가 끊임없이 소모되는 그런 상태가 이어졌다. 쉽게 지쳤고, 붕 뜬 기분으로 무의미한 인터넷 서핑 등을 하며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 십상이었다.
흐트러진 일상을 그러모으고, 피할 수 없는 ‘언택트’의 시간을 이왕이면 현명하게 이용하는 방법으로 찾아낸 것은, 평소에 엄두내기 힘들었던 긴 호흡의 책을 골라 읽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든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같은 것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도 그래서 읽게 됐다. 정사(正史)에 매우 충실하고 알차면서도 한번 시작하면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기까지 한 굉장한 시리즈라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분량도 부담스럽고 조선사에 관심도 없어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가 9월의 늦은 여름휴가 첫날 무심코 1권을 펼쳤는데. 세상에. 휴가 내내 잠을 아껴가며, 따로 노트에 꼼꼼히 필기해가며, 정신없이 20권까지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데에 휴가의 대부분을 쓰느라 애초에 계획했던 많은 일을 못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책을 진작 읽지 않은 것?
‘조선사가 뭘 이렇게까지 재미있어!’라는 감탄사를 연발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박시백 화백의 탁월한 이야기 구성력과, 역사 속 인물이 마치 내 곁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치밀한 묘사력의 힘인 것 같다. 단적인 예로, 10권인 <선조실록>을 읽다가, 너무나 많은 이가 신격화에 가깝게 추앙하는 바람에 오히려 식상하게 느껴지던 인물인 이순신 장군이 노량대첩에서 전사하는 장면을 보며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순신 최후의 순간에 관해 오만육천 번쯤 들었지만 단 한번도 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미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 결말까지 다 아는 이야기로도 사람의 감정을 끝내 건드릴 수 있는 것. 이게 박시백 화백의 저력인 것 같다. 그러니 전혀 몰랐던 사실을 그가 이끄는 대로 하나하나 알아가거나, 파편적으로 알던 사실들이 하나로 꿰어져 갈 때는 얼마나 더 재미있겠는가.

황희에 대한 기록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동안 알아왔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들이 생생한 사건 기록을 통해 펼쳐지자 조금 어이없기까지 했다. 이렇게 많은 명백한 기록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동안 몇몇 단편적인 야사의 기록을 통해 황희를 규정했을까? (…) <실록>의 구체적인 기록보다는 야사의 이야기가 지나칠 정도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이다. -p.203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언택트의 시대는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답답하고 막막한 이 시간들을 평소에 시도하지 못했던 긴 호흡의 좋은 책들을 돛단배 삼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건널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박시백의 이 책은 꼭 한번 타볼 만한 배라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무사히 9월을 건넜다. 근사한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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