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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를 맞고 단맛이 드는 과일처럼

김서령 작가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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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맞아야 단맛이 드는 과일이 있다. 따가운 가을볕을 쬐고 찬바람이 불고 난 후에야 결이 삭고 과육이 익는다. 그런 과일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맛과 영양 이상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인생도 이와 같다고 나는 믿는다. 나이 들어야 비로소 인생은 익는다. 익는다는 것은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예전에는 인간의 IQ(지능지수)를 중시했는데 요즘은 EQ(감성지수 혹은 공감지수)를 중시하고 미래에는 WQ(지혜지수)를 중시할 거라는 심리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에이지즘(ageism)이라 불리는 연령차별은 인종차별, 성차별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없고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없지만 나이는 다르다. 오늘 우리가 남의 것으로 여겼던 차별이 내일 우리 앞에 바싹 다가온다는 점이다.


전쟁 직후인 1953년에서 경제개발계획이 막 시작되던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우리들을 사회는 ‘베이비부머’라고 이름 붙였다. 굶주림과 콩나물교실과 군사독재를 경험한, 소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맨몸으로 이끌어온 우리들이 이제 슬슬 은퇴할 때가 됐다. 은퇴? 어디로 숨고 어떻게 물러설 것인가?


젊어서 죽지 않으면 누구나 늙는다. 늙음은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부모와 이웃들이 늙어가는 것을 봐왔기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데 자기 몸과 마음에 닥친 늙음은 전혀 낯설고 새롭고 당황되는 경험이다. 농경사회에선 따로 은퇴란 없었다. 땅은 아무리 늙어도 할 일을 남겨줬다. 호미를 들고 씨앗을 묻으면 서른 배의 알곡으로 보답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무실에서 자리를 치워버린다. 어디로든 숨고 어떻게든 물러나야 한다. 자~ 어쩔 것인가.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이 먹어도 계속 일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일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니까. 이젠 놀아야 한다. 논다? 논다는 것은 우리에게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지금까지 노는 것은 죄악이었다. 게으름도 산만함도 죄악이었다. 달리고 또 달리는 것만이 살 길이었으니까.


한 가지 제안을 해보려 한다. 바로 지혜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숙고할 수 있다. 잡다한 유혹을 거절할 힘도 있다. 내 능력 이상의 요구나 의뢰를 거절하는 정중함도 갖추고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손을 내밀 여유와 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마구 참견하고 간섭하면서 꼰대 짓을 하자는 의미는 천만 아니다(한다고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완성된 인간으로 성숙할, 깨달음을 달성할, 가장 유리한 조건에 놓인 인류인 것 같다.


먹고사는 데 급급할 나이는 지났다. 아주 조금만 소비하고도 생존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구도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면 된다. 어쩌면 은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기꺼이 주류사회 바깥에 머무는 것! 의식주의 사치와 풍요는 누릴 만큼 누려봤고 그게 별거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냥 놀자. 놀되 창조적으로 놀자. 창조라는 것은 자기 안의 것을 바깥으로 꺼내놓는 것이다. 꺼내놓되 자기 고유의 색깔과 향기를 지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는 작업에서 가장 깊은 만족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림을 그리든 도자기를 빚든 집을 짓든 밭을 만들든 글을 쓰든 노래를 만들든 상관없다.


학습기와 양육기가 지나면 임서기(林棲期)가 온다. 임서기는 글자 그대로 숲에서 사는 시기이다. 우리는 이제 숲에서 살자. 오직 자신의 자연성에 충실하며 얼굴 가득 만족한 웃음을 띠우기! 그럴 때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도 상당부분 풀려나갈 것이다. 낙관 낙관 또 낙관이다!

첨부파일 이슈-김서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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