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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만 즐거운 오락영화? 머리를 깨우는 오락영화!
이동진(영화평론가) 2008년 09월호
최근의 미국 영화가 대단한 것은 ‘아임 낫 데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작품들 때문만은 아니다.‘다크 나이트’나 '월•E'처럼 여름철 블록버스터의 자장 안에서도 장르를 혁신하고 신화를 재생하며 시대를 근심하는 뛰어난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늦여름이 되어서야 국내 개봉한 이 두 작품은 올해 할리우드가 내놓은 최고의 오락영화들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다크 나이트’에는 대작 오락영화 고유의 활력과 흥분이 있다. 동시에 언뜻 허황되게 보일 수 있는 수퍼 히어로 장르의 영화이면서도 그 속에 괴테와 셰익스피어와 구약성서 욥기의 저자를 사로잡았던 윤리적 딜레마와 철학적 성찰까지 선명하게 담아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선 언제나 텍스트와 스타일을 장악한 자의 자신감이 넘쳐난다. 데뷔작 ‘미행’ 때부터 서스펜스를 다루는 재능을 과시했던 그는 자신의 장점을 집대성해 ‘다크 나이트’를 그의 최고작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이야기의 퍼즐을 능수능란하게 맞춰나갈 것인가의 ‘메멘토’, 로케이션으로 어떻게 인물의 심리를 그려낼 것인가의 ‘인썸니아’,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고 어디서 생략할 것인가의 ‘프레스티지’의 방법론이 모두 들어 있다.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수퍼 히어로 장르는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와 스타일의 폭을 크게 넓히며 진화했다. 만화적인 조엘 슈마허나 표현주의적인 팀 버튼의 배트맨과 달리, ‘배트맨 비긴즈’에 이어진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마천루가 압도적인 시카고에서 직접 자동차들을 전복시켜 가며 찍은 이 영화는, 초인이라기보다는 특별한 힘을 갖출 수 있는 재력가에 가까운 배트맨의 행동과 고뇌를 흡사 느와르 영화처럼 다룬다. 근래 들어 어두운 블록버스터가 많아졌지만 이쯤 되면 암흑의 심장을 가진 수퍼 히어로 영화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 베일에서 모건 프리먼까지, 이 영화의 출연진들은 모두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히스 레저의 영화다. 혀를 날름거리나 입맛을 다시거나 뭔가를 오물거리면서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왜 악마가 유독 뱀에 자주 비유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에서 잘 드러나듯, 히스 레저가 대사 처리 방식에서 아주 뛰어난 배우라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증명된다. 이런 영화를 유작으로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배우라니! 히스 레저를 생각하는 순간, ‘다크 나이트’는 참으로 서늘하고 쓸쓸한 영화가 된다.

장편 애니메이션 '월•E'는 스스로 차(車)와 포(砲)를 뗀 채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는 장기의 고수 같은 솜씨를 보여준다. 쓰레기 수거용 로봇을 주인공으로 삼았기에 대사가 거의 없고 동작마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의 각 장면들에는, 그 한계 덕분에 역설적으로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애니메이터들의 흥분과 야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탁월한 표현력과 눈부신 상상력을 보여주는 초반 30분은 도저히 흠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

‘토이 스토리’에서 ‘라따뚜이’까지, 지난 십 수년간 애니메이션계에서 거대한 성과를 기록하면서 단 한 작품도 태작을 내본 적이 없는 픽사 스튜디오를 ‘최고의 두뇌집단’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리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만약 인류가 지구를 떠나면서 최후에 남은 로봇의 전원을 끄는 것을 깜빡 잊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최초의 기발한 착상에서 캐릭터와 이야기를 풍부하게 펼쳐나가고, 황폐한 지구에서 두 로봇과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누는 교감을 그 어떤 인간관계 못지않은 깊이로 그려낼 줄 아는 감성이야말로 픽사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버려진 것과 쓸모없게 된 것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바라보는 픽사의 시선은 기술에 중독된 많은 테크니션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루빅스 큐브에서 VCR 플레이어와 초기 전자오락 게임이었던 ‘퐁’까지, 미래 세계를 무대로 삼고도 짙은 향수를 곳곳에 불어넣은 이 작품에는, SF로부터 어드벤처와 성장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관객을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아마도 멜로적 요소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로맨틱한 경험인지를 이 영화만큼 멋지게 표현한 작품은 없었으니까.

기술적 측면에서도 ‘월•E’의 성취는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의 그림체와 촬영 방식은 이전 픽사의 작품들에 비해 사실적인 감각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초반부에서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도록 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따뜻한 톤으로 바뀌며 관객의 감정을 서서히 데워 올리는 조명도 좋다. 쌍안경과 캐터필러를 눈과 다리 삼아 직각의 녹슨 고철덩어리처럼 표현한 월•E에서, 계란 모양의 광택 나는 타원형으로 만들어낸 이브까지, 캐릭터 디자인 역시 훌륭하다.

전체적으로 ‘월•E’는 단편의 느낌이 강한 장편이다. 은하계를 떠도는 우주선 내부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중반 이후는 상대적으로 긴장이 줄어지고 영화적 힘도 좀 떨어진다. 그러나 두 로봇이 우주 공간을 유영하며 춤추는 환상적인 2인무와 천공을 올려다보는 월•E의 두 눈에 밤하늘 별들이 고스란히 비쳐지는 모습만으로도 이 영화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 장면들은 애니메이션이 꿈을 담아낼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테니까.


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
영화평론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0여년 간 조선일보에서 영화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1인 미디어 ‘이동진닷컴’을 운영하며 섬세한 글쓰기와 명쾌한 감성으로 다수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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