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KDI 경제정보센터

16개 경제부처가 만드는
국내 유일의 경제 정책 정보지

나라경제

발행물

특집

실익 따져 전략적으로 국산화 또는 이원화해야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한양대 HYU 석학교수 2019년 09월호


난해 우리나라 10대 수출품목 중 1위는 반도체로 1,267억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그리고 네 번째 품목이 디스플레이로 240억달러 규모였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산업은 한국을 대표하는 주력산업으로 세계시장에서 1등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앞서 세계시장을 주도했던 국가는 일본이었다. 따라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부품, 장비에 있어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한국 기업들은 일본 기업의 소재와 부품을 수입해 쓰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를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것은 이러한 경쟁구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목록)’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고, 우리 정부도 최근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맞대응했다. 국가 간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우리 기업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들의 근심도 깊어질 것이다.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 경제가 어려워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결국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외교적 해결책을 서둘러 모색하고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번 사태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 소재·부품 산업의 취약성을 개선하는 것이 우리의 장기적인 과제다.

해답은 정부·연구소 아닌 산업계에…기업의 전향적 자세도 필요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자고 하면 수입하고 있는 소재·부품·장비를 국산화하자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입하는 소재·부품·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이 과연 전방산업의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은 반도체 생산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전 세계 수백 개 협력사로부터 소재와 부품, 장비를 공급받고 있다.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은 글로벌 밸류체인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국산화한 제품의 품질이 담보되지 않거나, 충분한 물량을 제때 확보할 수 없다거나, 해외 기업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 국산화의 실익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 사태와 같이 핵심 소재나 부품의 조달이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난항을 겪을 수도 있기에 중요한 소재나 부품, 장비에 대해서는 전략적으로 국산화 또는 이원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재·부품·장비를 국산화할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정부나 연구소가 아니라 산업계로부터 먼저 구해야 한다. 산업계의 수요, 미래의 투자방향을 고려해 국산화할 품목을 정하고 국산화 로드맵을 정교하고 전략적으로 수립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도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소재·부품·장비 개발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나 정권은 유한하고, 국가연구개발사업도 유한하다는 데 있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1992년부터 2001년까지 G7 연구개발사업으로 대기업, 중소기업, 연구소, 학계가 협력해 대규모 국가연구개발사업을 수행했다. 그 결과 국내 메모리 반도체산업이 세계 1등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 이후 반도체 분야의 post-G7 연구개발사업을 계획했으나 대기업이 잘하고 있다는 논리에 부딪혀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국산화를 위해서는 최종 수요처인 대기업의 전향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차세대 반도체 생산공정 설계 단계에서부터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참여해 소재, 부품, 생산장비에 이르는 가치사슬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개발된 기술이나 제품이 특정 수요 대기업에 종속돼 다른 대기업에 판매할 수 없다면 중소·중견기업의 성장이 제한될 것이고, 소재·부품 산업의 생태계 구축도 어려워질 것이다. 특정 대기업과 협력해 소재, 부품, 장비를 개발한 경우라도 특정 대기업에 시한부 독점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제안한다. 또한 경쟁 관계에 있는 대기업일지라도 함께 협력해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고, 글로벌 경쟁구도하에서 우리 기업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중소·중견기업도 글로벌시장 진출을 전제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1조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우리나라의 한 해 국가 연구개발예산 총액이 20조원 규모다.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으로 모든 소재와 부품을 자급하고 반도체산업 전반에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국산화가 목적인 연구개발이라면 목표가 분명하기에 자원과 시간을 투입한다면 언젠가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기존 기업의 특허 공격, 가격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국산화 전략과 별개로 미래 반도체, 미래 디스플레이 시장을 주도해나가기 위한 연구개발시스템의 선진화는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연구개발부터 평가까지 수요자 입장 반영돼야
우리나라의 국가연구개발사업 성공률은 98%에 달한다. 실패한 연구가 없는데 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기술강국, 산업강국이 되지 못했을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과제였거나, 아니면 누구도 필요치 않는 과제를 해왔다는 반증이다. 대학이나 연구소는 연구를 위한 연구에 치중했고, 정부는 진정한 성과 창출보다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적당주의가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연구자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의 연구나 순수 기초연구가 아니라면 연구개발 단계에서 수요자의 입장이 반영돼야 하고 평가 또한 그들의 몫이 돼야 한다. 공정성만을 강조해 비전문가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평가해서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성공할 수 없다. 분야별 연구과제 선정평가, 중간점검 및 평가, 최종평가를 총괄할 전문가를 선정해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임기를 보장하고 실질적 권한과 책임을 줘야 한다.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나 국립과학재단(NSF)의 프로그램 매니저처럼 말이다.
끝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전략, 기술개발전략이라면 신중하고, 정교하고, 장기적이어야 한다. 돌발적인 외부 요인이 생겼다고 해서 즉흥적으로 기술개발 로드맵을 만든다면 이 로드맵은 같은 이유로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 특히 수요기업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정교하게 만들어야 하고, 단기간의 목표가 아닌 중장기적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1~2년 만에 달성할 수 있는 목표치라면 특정 연구소나 기업이 추진해도 가능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중대한 전략을 세계 만방에 알린다면 그것이 과연 유효한 전략일까를 고민해봐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우리의 작전을 적국에 노출시킨다면 그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KDI 경제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