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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없는 세상을 위한 전쟁
노유경 주제네바대표부 사법협력관 2019년 03월호



여행이든 출장이든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여정에 반드시 거치는 관문 중 하나가 공항이다. 출국장에 들어서면 각양각색의 인파가 오가고 면세품들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면세품의 대표주자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담배인데, 비흡연자인 필자로서는 그렇게 많은 담배들이 형형색색 단장한 채 도열해 있는 걸 볼 기회가 공항 면세점밖에 없으므로 소 닭 보듯 지나치면서도 끔찍한 혐오 사진과 경고문구가 병기된 담뱃갑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칠 때면 저런 걸 무릅쓰고라도 집어들 용기가 생기도록 하는 담배의 중독성이란 무섭고도 질긴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오랫동안 인류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해온 담배가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 적나라하게 밝혀지면서, 흡연이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고 담배는 그저 기호식품의 하나일 뿐이라는 논리는 점점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흡연자뿐만 아니라 간접흡연의 영향을 받는 사람 등 국민 전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담배를 규제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의 주도 아래 보건 관련 국제협약으로서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Framework Convention on Tobacco Control)이 널리 비준되고 각 나라별로 위 협약 목적에 상응한 강력한 담배규제정책이 실시되면서 각국별로 흡연가능연령 상향조정, 담배판매 고율 과세, 광고 금지·제한 등의 다양한 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담뱃갑 겉면의 처참한 사진들과 경고문구도 위와 같은 규제수단의 하나인데 실제로 상당한 흡연율 감소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6년여간 이어진 담배포장규제조치 분쟁, 마침내 일단락
그런데 더 나아가서 담뱃갑 포장 자체를 오로지 정해진 방식의 규격화되고 획일적인 크기·색상·형태로만 할 수 있도록 하고 상품명과 생산자 표기 외에는 상품별 고유 로고, 브랜드 이미지, 판촉문구 등 일체를 금지시킴으로써 한마디로 어떠한 종류의 개성이나 시각적 판촉 여지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겠다는 강력한 규제방식이 담뱃갑 단순포장규제방식(TPP; Tobacco Plain Packaging)이다. 이러한 규제방식을 실정법상으로 채택한 나라로는 호주·영국·아일랜드·프랑스·노르웨이·뉴질랜드 등이 있고, 캐나다·태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본격적인 입법을 추진 중이며, 벨기에·칠레·대만·핀란드·터키 등도 그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등 점차 확산 추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담배업계에서는 이러한 단순포장규제방식이 과도한 상거래·무역 제한을 초래하고, 상표사용권한 및 상업적 표현의 자유 등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해당 국가별로 또는 국제기구별로 소송을 제기해 여러 건의 법적 쟁송이 진행됐거나 진행 중인 상황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담배규제 국가로서 2011년 최초로 단순포장규제방식을 전격 실시한 호주를 상대로 주요 담배 수출국인 온두라스·도미니카공화국·쿠바·인도네시아·우크라이나가 그 이듬해 WTO 무역기술장벽(TBT; Technical Barriers to Trade) 협정 제2.2조, 파리협약(1967년) 제6조, 무역관련지식재산권(TRIPS;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Rights) 협정 위반을 주장하며 WTO 내 준사법기관인 분쟁해결기구(Dispute Settlement Body)에 제소하면서 담뱃갑 단순포장규제방식의 국제협약 위반 여부가 WTO 본무대에 오르게 됐다.
일명 담배포장규제조치 분쟁이라고 불린 이 사건은 장장 6년 이상의 시간을 거쳐 WTO 가입 회원국 중 30개국 이상의 대규모 ‘3자 참여’ 아래 엄청난 양의 증거들과 주장서면, 전문가 소견 등이 총동원된 싸움이었고, 마침내 지난해 6월 28일 분쟁해결기구 패널의 최종 판정 결과가 공식 공표됨으로써 일단락됐다.
위 분쟁의 쟁점과 사실관계는 패널 최종 판정 결과인 패널보고서가 부속서를 제외한 본문만 900페이지에 육박한다는 점에서 규모의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핵심 요지는 담뱃갑 단순포장규제방식이 TBT 협정에서 금지하는 기술장벽을 도입함으로써 국가 간의 무역거래에 불필요하게 과도한 무역제한(more trade-restrictive than necessary) 효과를 유발하는 조치에 해당하는지, 상표 등의 표시를 전면 금지당함으로써 상표등록, 상표 혼동가능성 배제권 등 상표권자의 상표사용에 관한 본질적 권리가 부당하게 제한된 것인지, 그로써 이를 실시한 국가가 지식재산권 보호에 관한 TRIPS 협정을 위반한 것인지, 담배생산업체의 경제활동의 자유와 경쟁의 공정성 보호에 관한 협약에도 반하는 것인지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피소국(호주) 손들어준 분쟁해결기구…‘국민보건’이라는 목적이 규제를 정당화한다고 판단
우선 패널 판정의 가장 강력한 근간이 되는 것은 단순포장규제방식이 추구하는 공적 목적으로서의 ‘국민보건’이다. 패널은 보고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논지로 호주의 단순포장규제방식이 그 자체로 독자적인 무역규제수단이 아니라 호주정부의 종합적인 흡연규제정책 중 하나를 구성하는 수단으로서 국민보건이라는 정책목표 아래 실시된 것임을 주목하면서, 그 어떤 이해관계도 인류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또한 담배포장규제방식이 극히 심각한(exceptionally grave) 국민건강의 위해요소, 특히 담배의 폐해로부터 더욱 취약한 청소년층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강력한 동기와 공적 목적의 정당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음을 선언했다.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면 이러한 규제방식은 목적달성을 위한 상당한 수단일까. 패널은 담뱃갑 단순포장규제방식이 흡연율 저감이라는 공익 목적에 얼마나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지의 사실관계를 제출된 통계자료 및 과학적 증거에 입각해 살펴봤다. 패널은 특정 브랜드와 로고, 디자인 등이 노출되는 기존 담뱃갑 포장방식은 소비자, 특히 사리분별력이 떨어지는 청소년층으로 하여금 호기심과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잠재적 소비층을 확대시킬 가능성을 높이는 반면, 단순포장규제방식을 도입할 경우 ‘실제로’ 그러한 판촉 효과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담배소비와 간접흡연 노출피해를 저감시키는 ‘유의미한 기여(meaningful contribution)’가 있음을 인정했다. 제품을 사고 싶도록 만드는 특정 브랜드나 로고, 독특하고 다양한 크기, 모양 등의 담뱃갑보다는 획일적이고 규격화돼 시각적으로만 볼 경우 제품 간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단순포장규제방식이 담배판매 및 소비량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볼 입증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위 규제가 제소국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필요하게 과하거나 부당한 조치일까. 우선 TBT 협정에 반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패널은 규제조치가 그 자체로 담배판매 및 소비량을 줄이는 효과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무역제한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다만 그 무역제한적 효과가 과도한 기술장벽에 해당하는지는 다양한 제반요소 상호 간의 이익형량을 통해 종합적인 고려를 해야 하는데, 무역제한의 정도, 규제가 없을 경우 초래되는 결과의 중대성, 규제목적 달성을 위해 대체 가능한 수단의 존부와 종류 등이 고려요소가 된다고 설시했다. 이러한 법리에 비춰볼 때 패널은 담뱃갑 포장방식을 규제함으로써 발생하는 담배판매와 소비 감소의 무역제한적 효과가 담배의 유해성으로부터 국민, 특히 청소년층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목적의 중요성이나 이를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결과의 중대성 등을 고려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상표권 침해가 있다는 TRIPS 협정 위반 주장에 대해 패널은 지식재산권 보호에 관한 WTO 협정은 그 자체로 창설적이고 절대적인 상표사용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요건 아래 무권한자로 하여금 상표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소극적(negative)’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고 봤다. 그런데 단순포장규제방식이 ‘부당하게(unjustifiable)’ 제한적인 요건을 부과함으로써 상표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요건 부과의 부당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위 규제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정당성과 해당 요건을 부과하는 충분하고도 적정한 근거가 제시됐다는 점에서 이를 부당한 제한요건의 부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TRIPS 등 국제협약이 그 자체로 상표권을 절대적 권리로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공중보건 등 보다 우위에 있는 정당한 목적하에서는 얼마든지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상표사용에 관한 권리를 불가침의 권리처럼 주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의 자유도 보다 고차원의 자유와 공익을 위해 얼마든지 규제대상이 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고, 단순포장규제방식을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상품명과 생산자 표기가 규격대로 이뤄지는 이상 경쟁업체나 소비자들이 표지 자체를 잘못 인식하게 된다거나 그 상품가치의 진정성 또는 실질가치를 저해시킨다고 볼 수도 없으므로 경쟁의 공정성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패널은 호주의 단순포장규제방식이 자국 국민건강 등 공중보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회원국의 재량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취해진 규제권 행사에 해당하고,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상당성 및 대체불가성, 비례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제소국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협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지으면서 단순포장규제방식의 정당성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담뱃갑 단순포장규제방식에 대한 국제기구 최초의 공식적 유권해석
그동안 특정 국가 내에서 제기된 소송에 따라 해당 사법부가 개별적인 법리판단을 한 적은 있어도 국가 간의 무역거래관계에서 담뱃갑 단순포장규제방식에 대한 국제기구의 공식적 유권해석이 이뤄진 것은 최초라는 점에서 이번 패널 판정은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패널보고서가 공개된 후 승소국인 호주 당국뿐만 아니라 금연정책을 지지하는 많은 정부·비정부 단체들로부터 패널 판정을 환영한다는 입장 표명이 있었고, 유사 조치의 시행 또는 입법을 앞두고 있는 여타 국가도 이러한 단순포장규제방식에 관한 WTO 협정위반 우려를 상당 부분 덜어내고 향후 적극적인 규제조치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이번 판정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이 판정 결과에 온두라스와 도미니카공화국이 불복해 각각 상소를 제기함으로써 공은 WTO 상소기구에 넘어가 있는 상태다. WTO 상소기구 위원 결원사태, 상소사건 적체, 본 분쟁 사안의 복잡성과 방대함 등을 고려하면 아마도 상소절차가 최종적으로 끝날 때까지는 또 지난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번 분쟁 사안이 갖는 민감성이나 세계적 파급력, 패널심리 단계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를 법률심인 상소기구에서 재차 판단할 수 없음을 고려할 때 패널의 최종 판정 논지 자체가 번복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거대 자본과 조직력에 기반한 담배업계의 집요한 수성 노력, 국민보건 증진을 기치로 내세워 흡연규제를 하겠다면서도 담배판매와 소비에 대한 과세로 얻는 막대한 세수 확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라별 이중적 태도 등으로 담배 없는 세상을 위한 싸움은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쉽지 않은 격전이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이 격전은 그저 거대 담배업계 등 소수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돈의 논리에 휘둘려 이뤄지는 힘겨루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우리,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대원칙이 그 어떤 목적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임해야 하는 싸움임을 명심한다면 언제나 그 전열을 가다듬고 물러서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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