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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 EU 통합의 바로미터
안성근 주벨기에·유럽연합대사관 금융관 2019년 04월호



유로화가 출범한 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사람의 인생에 비유하자면 성년이 된 것이다. 출범 당시 기대와 함께 많은 우려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글로벌 금융위기와 남유럽 재정위기라는 큰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앞으로 유로화가 나아가야 할 길은 험난하다. EU의 공동통화로 설계된 유로화는 전체 28개 회원국 중 아직은 19개국[유로지역(euro area) 또는 유로존(eurozone)으로 지칭]만이 사용하고 있으며, 가입 당시 예외조항(opt-out clause) 적용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통화를 사용해왔던 영국은 조만간 EU를 떠나려 한다. 역내 정치적 불확실성이 확대된 가운데 최근 들어 EU경제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유로화의 미래에 대한 걱정 섞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유로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자.


전쟁 재발 방지 염원 담아 유로화 창설
유로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통합을 강화해 비극적인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결단의 산물이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통화공동체 설립을 주도했던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같은 통화를 사용하는 국가들 간에 전쟁을 한 사례는 없다”는 말은 유로화 창설의 목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유럽 평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정치와 경제의 완전한 통합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1989년 6월 마드리드 EU 정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유럽경제통화동맹(EMU; Economic Monetary Union)은 3단계로 나눠 추진됐다. 제1단계(1990~1993년)에는 역내 자본이동 규제가 철폐됐다. 제2단계(1994~1998년)에는 유럽중앙은행(ECB; European Central Bank)의 모태가 된 유럽통화기구(EMI; European Monetary Institute)가 설립됐으며, EMU 출범 이후 단일 통화정책이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선결조건으로서 물가·재정·금리·환율에 대한 ‘경제수렴기준(economic convergence criteria)’을 설정하는 등 제도적 여건을 마련했다. 제3단계(1999년 이후)에서는 ECB가 참가국의 통화주권을 인수했으며, 2002년부터 유로화 지폐 및 주화의 유통을 개시했다.
EU 차원의 공동 통화정책을 당장 수용하기 어려운 회원국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공동 통화정책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독자적인 화폐 발행 및 통화정책 권한을 허용했다. EU 회원국이지만 아직 유로화를 채택하지 않은 9개 회원국 중 EU 가입 당시 예외조항 적용을 인정받은 영국과 덴마크를 제외한 나머지 7개국은 궁극적으로 유로화를 채택하도록 돼 있다. 즉 이들 7개국은 유로화를 채택하기까지 자국통화 및 독자적인 통화정책 권한을 유지하되 유로화 채택에 필요한 경제 및 법규 수렴조건을 충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EU가 채택한 EMU는 통화정책과 여타 경제정책에서 상이한 정도의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적 정책통합은 개별 회원국 정부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분야와 시점에서만 EU 차원의 공동정책을 추진한다는 보조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에 근거하고 있다. 즉 역내 단일시장 형성을 위해 필수적인 공동통화의 채택은 회원국의 통화주권 포기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재정정책 등 여타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단일시장 형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회원국별 경제상황에 맞는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세계 2위 결제통화로서 높은 위상 유지…긍정적 인식은 역대 최고
유로화의 안정성은 전 세계 GDP의 12%(EU 기준 17%)를 차지하는 유로지역의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유로화는 국제통화로서 전 세계 60여개국이 자국의 통화로 사용하거나 통화가치를 연동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결제의 36%(2017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 2위의 결제통화이며, 주요국의 외환보유액 중 약 20%의 비중을 차지하는데 미달러화(60%)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타 통화에 비해서는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유로화에 대한 유로지역 국민들의 인식은 어떨까? EU집행위원회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유로바로미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64%가 유로화 사용이 자국에 도움이 된다고 응답했으며, EU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74%로 나타났다. 이는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특히 조사대상자의 36%는 유로화가 유럽통합의 상징이라고 응답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분리주의와 포퓰리즘, 극우 민족주의의 부각에도 불구하고 유로화에 대한 지지는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유로 정상회의를 앞두고 장 클로드 융커 EU집행위원장은 유로화 도입 이후 유로존경제가 견조한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으며 실업률도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로화는 이미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앞으로 핵심 부문에서 유로화의 사용비율을 높임으로써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원유를 비롯한 에너지와 원자재, 식료품, 운송 등 전략 분야 교역에서 유로화 사용을 늘릴 것을 회원국에 권장했다. EU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수입하는 지역임에도 유로화로 거래하는 비율이 원유의 경우 10%, 천연가스는 30%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높여 나가겠다는 것이다.


미래 낙관하긴 아직 일러…근본적 변화 필요할 듯
그러나 유로화의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2016년 「유로: 공동통화가 어떻게 유럽의 미래를 위협하는가」라는 책을 통해 유로화는 실패한 프로젝트이며 유럽의 통합을 위해서는 유로존의 구조와 정책 모두를 대대적으로 개선하거나 그게 안 된다면 공동통화 시스템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동통화는 단일 금리와 환율 수준을 수반한다. 이들 경제변수는 다수 회원국의 경제여건을 반영해 결정되는데, 그 수준이 적합하지 않은 나라들도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유로화 출범 이후 유로존의 금리는 독일과 프랑스 등 경제 강국의 펀더멘털을 반영해 낮아졌고 이는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주변국에 경기부양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생산성 향상에 기반한 공급 측면의 긍정적 개선이 아니었으며 소비·투자 증가 등 내수에 힘입은 것이라 수입이 늘고 경상수지 적자는 확대됐다. 내수 호황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자산 가격에도 거품이 생겼다. 자산거품과 경상수지 적자는 장기간 지속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금리와 환율의 자율조정기능이 작동해 불균형을 시정하게 된다. 하지만 환율과 금리를 조정할 수 없는 개별 국가는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부족하다. 재정정책도 유로존 협약에 따라 재정적자 상한선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는 어렵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방만한 재정운용 때문이라기보다는 공동화폐 자체가 원인이라는 것이 스티글리츠의 생각이다.
이보다는 다소 온건하지만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의 분석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일률적인 통화정책은 고인플레이션 국가에 낮은 실질금리가 유지되도록 만들었고 이는 자산거품으로 이어졌다. 유로화 도입 이후 경제여건이 취약한 회원국들은 경제·사회·정치적으로 더 큰 상처를 입고 있으며, 회원국 간 생활수준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공동의 정치적 의사결정이 부재한 상태에서 서로 다른 경제제도와 행태를 갖고 있는 국가들을 묶어놓을 경우 유로화는 유럽 시민들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하지만 유로존의 해체는 전후 유지돼온 취약한 국제질서에 큰 타격을 가하고, 경제적으로도 그 비용이 너무나 크다. 따라서 유로존의 해체는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유로존은 불가피하게 성공하도록 숙명지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다른 유력경제지인 이코노미스트의 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로존은 지난 재정위기를 독일과 프랑스가 협력해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란조끼 시위 이후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 메르켈 총리의 2021년 퇴임 등을 감안할 때 은행동맹과 자본시장동맹의 완성, 재정통합의 진전 등 진정한 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탈리아 재정불안과 같은 새로운 위기가 온다면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 우려한다.
유로화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후 이어진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를 경험하고도 꿋꿋이 버텨왔다. 세계 2위의 경제공동체가 분열하는 사태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많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뤄져왔다. 올 한 해 유럽에서는 영국의 EU 탈퇴, 유럽의회 및 각국 선거, EU집행위원회의 교체 등 많은 정치 이벤트들이 이어진다. 유로화의 향방과 EU의 통합이 이런 이벤트들의 결과와 EU 국민들의 대응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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