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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무역체제의 가능성을 보여주다
장성화 주제네바대표부 1등서기관 2019년 05월호




WTO는 지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지난해부터 WTO 상소기구 위원이 임명되지 않아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상소기구에 대한 우려는 이제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회의론으로까지 확대됐다. WTO에 대한 회의론은 사실 갑자기 대두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도하개발어젠다(DDA; Doha Development Agenda)의 협상 개시 이후 수차례 제기됐다. WTO 출범 당시 의도했던 규범 창출, 이행 감독, 분쟁 해결이라는 목표가 지나치게 높았다는 냉소적인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WTO 출범 이후 지난 25여년간 WTO는 아무런 발전도 없었는가? 제네바 현지에서는 WTO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 아래 각 위원회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한편, 기능 강화 방안도 논의 중이다. 각 위원회별로 그 역할이나 운영방식은 상이하다. 현재 모범사례로 가장 주목받는 위원회 중 하나는 무역기술장벽(TBT; Technical Barriers to Trade) 협정을 담당하는 TBT 위원회다. 현지에서는 TBT 위원회의 장점을 여타 상품무역이사회 산하 위원회들이 적극 활용하고, 심지어는 서비스이사회 산하 여타 위원회에서도 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TBT 위원회가 어떻게 다자무역체제의 현실을 개선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정무역현안 절차로 법적 분쟁을 사전에 예방
TBT 위원회는 ①분쟁예방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특정무역현안(STC; Specific Trade Concern) 절차를, ②컨센서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3년 주기 검토보고서(triennial reviews)’를, ③과학기술 발전과 민간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운영체제 개선 등을 시행해왔다. 이러한 발전들은 TBT 위원회와 회원국들이 계속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먼저 TBT 위원회의 가장 큰 장점은 회원국들이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STC 절차다. STC 절차란 WTO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의 TBT 관련 조치로 인해 발생한 우려사항(concern)을 공식 회의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회원국은 자국의 우려사항을 정례회의 개최 10일 전까지 공식 제출하고, 우려사항을 전달받은 회원국은 실제 정례회의 때 이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WTO 회원국은 STC 절차를 통해 법적인 분쟁 전에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자국의 우려를 공식적으로 상대 회원국에 제기한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분쟁해결 절차가 상소기구 위원의 공석으로 사실상 그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STC 절차는 갈등의 소지를 공식적으로 논의할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욱이 TBT 위원회와 위생검역협정(SPS; Agreement on the Application of Sanitary and Phytosanitary Measures)은 도입 예정인 조치에 대해서도 통보를 규정하고 있어 위원회에서 사전 예방적 논의가 가능해 더욱 의미가 크다(TBT 협정 제2.9.1조). 시장접근위원회, 수입허가절차위원회 등 다른 위원회에도 STC 절차가 있다. 그러나 여타 위원회들은 실제 조치 시행 이후, 즉 피해가 발생한 이후 해당 조치에 대한 논의가 가능한 데 반해 TBT 위원회는 시행 전 조치에 대해서도 공식 회의 시 논의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TBT 위원회는 실제 시행 전 조치를 다룰 수 있는 규정과 절차가 있어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췄다는 장점이 있다.
TBT 협정의 경우 1995년 이후 총 3만3천건의 통보가 있었으며, TBT 위원회에서는 STC가 약 570건 논의됐고, 그중 오직 7건만 분쟁화됐다. 이러한 수치가 STC 절차가 관련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했다는 의미는 아니나, 이 절차는 우려사항을 공식적으로 제기해 다자체제하의 상대방 회원국에 압박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민간기업이 외국의 무역제한적 조치를 자국 정부에 보고해 이를 TBT 위원회에 제기하는 사례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STC 절차는 민간기업에도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다. 실제 일본 등 다수 국가의 기업들은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STC 절차에 관심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기업들도 TBT 위원회의 STC 논의 결과에 따라 실제 혜택을 누리고 있다.



TBT 협정 내용 명확화하고 논의방식 진전 위해 3년마다 관련 검토 진행
다음으로 TBT 위원회의 ‘3년 주기 검토보고서’를 또 다른 모범사례로 들 수 있다. TBT 협정은 이행과정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협정의 내용을 보다 명확화하고 논의방식을 진전시키기 위해 3년마다 관련 검토를 진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TBT 협정 제15.4조). 특히 3년 주기 검토보고서는 협정상 의무 개정이 아니라 보고서에 포함된 결정(decision)과 권고사항(recommendation)을 통해 협정을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3년 주기 검토보고서의 작성은 컨센서스에 기반해 실제 합의가 이뤄지기까지는 수많은 비공식 논의 등으로 인내가 필요한 절차이나 회원국들에 의한 점진적 개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STC 절차도 3년 주기 검토보고서를 통해 진화해왔다. 2009년에 채택된 ‘제5차 3년 주기 검토보고서’에서 STC 절차를 TBT 위원회의 공식 절차로 명확하게 규정했다. 또한 2018년 11월 완료된 ‘제8차 3년 주기 검토보고서’에서는 한 번 더 이 절차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권고사항을 제시했다. STC의 정례회의 전 제출시한을 기존 10일에서 15일 전으로 앞당긴 것이다. 이는 STC를 해당 회원국에 조금 더 일찍 전달해 실질적인 답변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60여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국제기구에서 회원국 간 컨센서스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문제점을 해결하고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회원국 간 합의를 통해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3년 주기 검토보고서의 작성과 논의 과정은 다른 논의 과정보다 훨씬 길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모든 회원국이 참여하고, 잦은 비공식 회의가 개최된다.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않은 사항은 제외되기는 하나, 한번 채택된 내용을 부인할 수는 없다. 회원국들은 너무 많은 절차를 거쳐서 채택된 내용에 대해 참여하지 않았다고 발뺌할 수도 없다. TBT 위원회는 이렇게 어렵지만 긴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위원회 운영을 현실에 맞게 반영해가고 있다.


통보제출·정보관리·알림시스템 활용해 효율성과 사용자 편의성 증대
TBT 위원회의 세 번째 장점은 기술을 활용한 운영체제 개선이다. TBT 위원회는 WTO의 어떤 위원회보다 적극적으로 최근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①TBT 통보제출시스템(NSS; Notification Submission System), ②TBT 정보관리시스템(IMS;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 ③e-Ping 알림시스템 등이다. 이러한 기술의 활용은 효율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더욱 확장돼 민간의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측면도 있다.
TBT NSS는 인터넷 기반 사회생활이 자연스러운 국내에서는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회원국들의 다양한 역량 등으로 인해 WTO 일부 위원회에서는 자료의 전자적 전송 자체에 부정적인 경우도 여전히 존재한다. 제네바 현지에서는 아직도 서한을 통해 주요 입장을 제시하고, 서면으로 된 자료만을 정식 접수하기도 한다. TBT NSS는 사용자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양식(template)도 제공해준다. 회원국 본부에서 직접 관련 정보를 입력할 수 있고, 이를 시스템에서 관리하므로 여러모로 효율성이 증대했다.
TBT IMS는 앞서 언급한 TBT의 장점 중 하나인 STC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TBT IMS는 TBT 통보와 STC에 대한 포괄적인 자료를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로 사용자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STC는 시스템상 고유한 번호를 통해 관리되고, 그동안의 전체 현황도 제공해주므로 유사한 STC 관련 정보 검색에도 용이하다.
e-Ping 알림시스템(www.epingalert.org)은 TBT 및 SPS 통보내용을 해당 시스템 등록자에게 이메일 알림서비스로 제공하는데, 수출입업자 등 민간기업도 시스템에 등록이 가능하다. 이 시스템은 등록자가 지정한 특정 시장과 특정 상품 관련 정보가 있을 경우 이메일을 통해 자동으로 관련 정보를 등록자에게 알려준다. 이는 여타 WTO 위원회와 비교했을 때 회원국 편의뿐 아니라 민간에게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점에서 매우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여기까지 TBT 위원회의 주요 모범사례를 살펴봤다. 그간 TBT 위원회는 STC 절차, 3년 주기 검토보고서, 최신 기술을 활용한 운영체제 개선 등을 통해 현안을 시의적절하게 다룸으로써 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해왔다. 비록 TBT 위원회가 WTO가 직면한 현실의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없으나, 이러한 강점들은 WTO의 다양한 위원회들의 기능 강화 방안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 다자무역체제인 WTO 기능의 개혁 논의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기존 기능의 점진적인 강화를 통한 가장 기본적인 개선의 노력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WTO의 각 위원회마다 고유의 특성과 상황이 있으므로 TBT 위원회의 모범사례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으나, TBT 위원회의 점진적 개선사례는 다자무역체제의 가능성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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