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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독대하는 시간인데 일주일은 너무 짧지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9년 08월호




“여행이 외부 세계를 향해 견문을 넓히는 과정 같지만 기실 모든 여행은 자신으로의 내면 여행에 다름 아니다.”
박상우 작가의 「소설가」라는 책을 읽는 중에 눈에 번쩍 뜨인 문장이다. 일종의 작법서이자 소설가의 삶을 다룬 책임에도 여행의 정수가 쓰여 있었다. 여행은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면을 갈고 닦는 시간이다. 그러니 창작을 업으로 삼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여행을 통해 작품의 소재와 영감을 얻는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소설가에 한정해서 얘기해봐도, 김훈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전거 여행자일 것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지에서 장기 체류하며 오전에는 소설을, 오후에는 여행기를 쓰기도 한다. 박범신은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다가 영감을 얻어 산악소설 「촐라체」를 썼다. 그리고 지금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1위는 몇 달째 김영하의 여행서인 「여행의 이유」가 차지하고 있다. 열거하다 보면 끝이 없을 정도다.

촬영감독의 일이란, 누군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창작해내는 일이다. 수많은 소설가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몇 달 동안 매진한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프로젝트가 끝나면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 사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여행에서 하는 일이란 지난 작업의 태도를 복기하고, 다음 작업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세상을 두루두루 구경하며 영감을 쌓는 데 있으니, 그저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작업과 작업 사이에 그러한 틈을 갖지 않았다면 정신적으로 지쳐서 일을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하고, 일을 계속해나갈 창의적 동력을 구하지 못해 낙오됐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한 여행의 대부분은 혼자서 떠난 것이었다.
가끔은 연인과 일정을 맞춰 함께 가기도 하고 혼자서 가기에 지나치게 위험한 험지로 갈 때는 탐험심 많은 친구들과 함께하기도 하지만,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홀로 있음의 환희를 누리는 시간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스케줄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모임과 경조사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와 메신저 알림은 우리의 삶을 한없이 번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 나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 당도하면 익명의 존재가 돼 자유롭고 여유롭게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모임과 경조사에 빠져도 어쩔 수 없이 면책되기 마련이고, 귀찮은 전화를 안 받아도 되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심지어 해외 로밍 안내를 들으면 대부분은 전화를 건 쪽에서 먼저 끊는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평소에 짊어져야 했던 정서적 억압이나 사회적 의무 같은 것들의 구속력이 매우 약해진다.
그러니 여행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쓰인다. 일어나는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구경하고 싶은 것을 보러 가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여행이라는 해방의 시공간에서 온몸의 감각은 생생하게 깨어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귀한 시간이 찾아온다. 자아와 독대하는 시간 말이다.
인연을 맺고 있는 국제평화단체가 있어서 그들의 공동체에 종종 들린다. 지난해엔 의외의 멤버가 합류한 것을 봤는데,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독일인 청년 둘이었다. 1년간 공동체에 봉사하며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사유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갭 이어(gap year)’였다. 갭 이어는 ‘휴학’과 비슷한 뜻인데, 고교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대학에 곧장 진학하거나 취업하지 않고 1년 정도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사회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조금 생소한 개념이지만, 영국에서 시작된 갭 이어는 이제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진 보편적인 교육 시스템이 다. 갭 이어 동안 해외로 자원봉사를 가거나 오지여행, 외국어 연수, 예술활동,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화적 자산을 축적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청년들은 여행과 연계된 활동을 한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서 생활하며 스스로 개척해가야 할 인생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갭 이어를 보낸 그 독일인 청년 둘이 곧 귀국한다는 소식이 들려 안부를 물으니, 한 청년은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하고, 한 청년은 아직 잘 모르겠다며 독일로 돌아가서 시간을 조금 더 가질 거라고 했다. 물론 고국의 가족과 고민을 충분히 나눴을 테지만, 스스로 고민한 끝에 주체적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들이 보낸 청춘의 어느 1년이 충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국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순차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 해를 다른 일로 보내는 것을 낭비로 여기는 듯하다. 취업경쟁에 그만큼 늦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반영되는 것 같고, 남자의 경우 군복무로 보내야 할 시간에 대한 부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자아를 계발하는 시간에 인색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상황이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진다. 갭 이어가 고교과정을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를 떠나, 연속되는 해 사이에 단절을 두고 삶과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하다. 마치 대학교수가 안식년을 보장받는 것처럼. 갭 이어가 언감생심이라면, ‘갭 먼스(gap month)’라도. 실제로 언젠가부터 ‘한 달 살이’가 대단히 열풍이다. 제주도나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한 달을 살아보는 것 말이다. 자아를 만나고 오기에 일주일 남짓한 여행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기 마련이다.


직장인들이 이 글을 본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세상 편한 소리 한다고. 그것이 나도 충분히 죄송하고 안타깝다. 여태 여행하며 한 달, 두 달 휴가를 얻어 여행을 다니는 유럽의 직장인들을 많이 만났다. 회사원, 은행원, 의사 등 직업도 다양했다. 그들은 되는데, 우리는 왜 그런 휴가를 갖지 못할까? 하루빨리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식이 바뀌어 긴 휴가가 허락되기를 함께 바랄 뿐이다. 자아를 만나고, 삶의 동력을 얻기 위해 틈을 만들고 여행하는 것은 청년들에게만 좋은 것도 아니요, 예술가들에게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남은 인생은 언제나 충분히 길다. 인생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오직 혼자서 개척해야 하는 멀고 긴 여정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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