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KDI 경제정보센터

16개 경제부처가 만드는
국내 유일의 경제 정책 정보지

나라경제

발행물

칼럼

사진을 위해 여행을 희생하지 않기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9년 09월호


 

 
내게 사진 작업이란 ‘가벼움’의 미학이다. 상대적인 의미다. 사진과 영상 사이를 넘나들며 일하긴 해도 본업이라 할 만한 것은 영상을 촬영하는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는 엄청나게 많은 촬영 장비를 동원한다. 카메라를 싣는 장비차가 따로 있어야 하고, 조명 장비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욱 불어난다. 장비들이 고가인 것은 물론이고 크고 무겁기 때문에 스탭이 여럿 있어야만 촬영할 수 있다. 촬영 스탭뿐만 아니라 연출, 제작, 녹음, 미술 등 여러 부서의 스탭과 긴밀한 협업이 필수적인 일이다. 촬영장에는 대략 50여명의 스탭이 상주하고 때때로 100명이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한 공동 작업은 많은 순간 극심한 피로를 유발한다. 의도치 않게 현장의 동료들과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영상 작업은 무거운 일이다. 장비의 무게뿐만 아니라 사람의 무게까지 더해. 현장의 무게에 짓눌린 나는 종종 사진 찍는 시간을 그리워한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단출한 카메라 한 대를 달랑 쥐었을 때의 그 한없는 가벼움을.
욕심이란 끝이 없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지금의 나는 사진 찍을 땐 최대한 가볍게 장비를 꾸리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의 교훈이 무거운 카메라를, 즉 욕심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10여년 전 3년 동안 아시아 전역을 여행했었다. 한창 젊었을 때라 패기가 넘쳤고 욕심 또한 넘쳤다. 때는 바야흐로 사진산업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던 중이었다. 필름이 지닌 품격과 디지털이 가진 효율성 사이에서 나는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필름 카메라 한 대와 디지털 카메라 한 대, 도합 두 대의 카메라를 메고 여행에 나섰다. 크고 무거운 전문가용 카메라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광각 줌렌즈와 표준 줌렌즈를 챙겼고, 어두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렌즈를 또 챙겼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인데 100여개의 필름을 항상 들고 다녔다. 아시아의 후미진 지역에서는 ‘신선한’ 필름을 구하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렇다. 필름이란 의외로 저온에서 신선하게 보관하는 게 중요한 물건이다.) 그것들을 다 메고 다니자면 얼마나 고역인지 몰랐다. 한두 달도 아니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것 하나 내려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장비였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방글라데시에서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룻밤에 2달러 하는 허름한 숙소에서 자고 있는 사이 도둑이 든 것이었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낮에 찍은 사진들을 보느라 머리맡에 놔뒀던 디지털 카메라 한 대만 남겨두고, 나머지 장비는 죄다 훔쳐가고 없었다.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여행을 중단하고 귀국할까 고민했지만, 디지털 카메라 한 대는 남아 있으니 여행을 마저 이어 가기로 했다. 너무나도 괘씸한 도둑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장비가 많이 줄어 배낭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들고 가볍게 다니는 여행은 경쾌했고 더욱 즐거웠다. 그동안 내가 짊어졌던 장비의 무게는 결국 내 욕심의 무게란 것을 깨달았다. 도둑은 카메라와 함께 내 욕심도 가져갔다. 나중에는 그 도둑에게 은근히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또 한 번의 교훈은 알프스에 산악스키 여행을 갔을 때다. 보통의 스키는 내리막을 내려오는 도구지만, 산악스키는 오르막을 오를 수 있게 돼 있다. 쉽게 말해 스키를 신고 눈 덮인 산악지형을 오르락내리락 트래킹하는 것이다. 알프스의 ‘오트루트’라는 코스가 유명한데,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스위스의 체르마트까지 일주일 동안 스키로 이동하는 것이다. 오트루트를 출발하기 하루 전 나는 일행과 함께 샤모니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했다. 산악스키라는 게 워낙 체력 소모가 극심한 운동인 데다 기온이 낮고 고도가 높으니 더욱 힘들었다. 세상에 이보다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때도 내 몸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전문가용 카메라 하나와 콤팩트 카메라 하나. 힘든 여정인 것을 짐작해서 이미 줄이고 줄인 장비였다. 더 줄이면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힘들었던 나는 사진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생존 본능처럼 전문가용 카메라를 내려놓고 콤팩트 카메라만 챙겨 오트루트에 나섰다. 큰 카메라를 가져갔다가는 여행 자체를 망칠 판이었다. 그까짓 사진쯤이야 좀 못 찍으면 어때. 내가 여행을 왔지, 일하러 왔나. 콤팩트 카메라에는 광각 렌즈가 달려 있었다. 넓은 풍경을 찍기에는 좋았으나 구체적인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피사체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야만 했다.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여행 사진의 본질이었다. 찍을 수 있는 것만 찍는 것. 못 찍는 상황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쿨하게 받아들이며 여행에 더 많이 집중하는 것. 사진을 위해 여행을 희생하지 않기. 여행이 먼저고 사진은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 그때의 여행 사진을 보면 넓은 풍경에 사람은 점처럼 작게 담겨 있어서 조금은 아쉽긴 하다. 그러나 사진을 얻지는 못했어도 그보다 중요한 교훈을 얻었기에, 내겐 너무나도 감사한 사진이다.
주변 사람들이 여행을 앞두고 카메라를 새로 살 때 기종을 추천해달라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시시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냥 이뻐 보이고 작고 가벼운 카메라 아무거나 사라고. 물론 브랜드나 모델마다 카메라의 특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작은 차이다. 사진의 보다 큰 차이는 카메라가 아니라 사진사에게 달려 있다. 카메라는 도구일 뿐이며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모든 상황을 만족시키는 카메라와 렌즈는 없다. 그 순간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와 렌즈가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사진이 된다. 욕심을 내려놓고 카메라에서 해방되면 여행은 더욱 즐거워진다.
KDI 경제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