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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밥 대신 맛있는 밥…쌀 소비 표준이 변하고 있다
이해림 푸드라이터 2020년 01월호


예전엔 집에 뒤주가 있었다. 쌀 한 가마니 80kg이 다 들어가는 크기였다. 가을이 깊어 햅쌀이 올라오면 뒤주에 쌀을 가득 채워 놓고 엄마는 흐뭇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쌀, 품종이 뭐였을까. 필시 혼합미였을 것이다. 뒤주가 있었던 곳은 거실. 쌀이 뜨끈한 실내에서 괜찮았을까. 쌀의 지방이 산패해 맛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도정 기술이 좋지 않아 깨진 쌀도 많고 심지어 돌도 씹히곤 했다. 과거는 보통 미화된다던데 쌀에 대한 팩트를 따져보니 미화할 구석이 없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다.
‘임금님표 이천쌀’은 쌀의 브랜드 시대를 열었다. ‘고시히카리’ 유행은 혼합미 시대를 넘어 쌀마다 품종이 다르다는 것을 소비자에게 인지시켰다. 그리고 최근에는 추청, 오대, 히토메보레, 호품, 삼광 등 뛰어난 밥맛을 내는 쌀 이름이 곳곳에서 흔하게 회자된다.
내 집 쌀은 뒤주 대신 냉장고에 보관한다. 뒤주와 또 다른 점은 모두 소포장된 단일 품종 쌀이라는 것이다. 한 솥에 밥 짓기 딱 맞는 500g짜리 진공팩부터 많아 봐야 2kg 이내인 작은 단위의 쌀을 갓 도정한 것으로 여러 품종을 수시로 사다놓고 먹는다. 단일 품종, 소포장, 도정 후 2주 이내, 서늘한 곳 보관 등 ‘밥맛의 원칙’을 잘 지키면 밥맛이 좋아진다.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식문화 다양화로 인해 밥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밥의 맛에 대해서는 집단 민감도가 더 높아졌다. 적게 먹는 만큼 맛을 따지게 된 셈이다. 시장은 이제 배부른 밥 대신 맛있는 밥을 일제히 향해 있다. 쌀을 소비하는 표준이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싸전 대신 쌀 편집숍이 새로운 표준이다. 현대백화점 각 지점의 ‘현대쌀집’과 서울 마포구에서 시작한 ‘동네정미소’가 쌀 편집숍이라는 카테고리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 동네정미소는 지점을 늘리며 쌀에 관련된 먹거리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르는 복합 매장 겸 쌀밥을 중심에 둔 식당으로 진화 중이다. ‘도정공장’, ‘동수상회’, ‘일산쌀’ 등 온라인에서 활약하는 근사한 쌀 편집숍도 등장했다. “미역국, 갈비찜과 함께 먹기 적당한 쌀 2인분, 그리고 김치볶음밥에 적합한 쌀 1인분 주세요.” 이런 전문 매장에서는 이렇게 디테일한 소량 주문이 가능하다. 품종마다 특성이 다르고 이를 다루는 전문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쌀집에는 쌀 소믈리에도 있다.
한국에서 주로 소비되는 밥쌀용 품종 외에도 볶음밥, 쌀국수, 리소토에 특화된 쌀 품종에 대한 요구도 늘었다. 쌀 가공식품 제조를 위한 특수 품종 쌀 연구가 활발히 행해지고 있다. 가공용 쌀 소비도 활용처가 다양해졌다. 최근 쌀 간식류가 흔해진 가운데 눈길을 끄는 가공식품으로 쌀 막걸리도 있다. 토종벼 생산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토종벼 단일 품종 막걸리 맛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요리연구가 홍신애 씨는 이미 몇 해 전에 ‘쌀가게’라는 식당을 운영했다. 당일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 것은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는 쌀을 이용한 간식도 개발해 지난여름 출시했다. 홍 씨는 쌀 가공식품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 쌀눈과 쌀 껍질의 영양성분을 온전히 섭취할 수 있는 형태라는 것, 보관과 도정 과정을 관리해 가장 맛 좋은 상태의 쌀로 가공해 최상의 맛을 구현한다는 것, 한국인에게 익숙한 간식을 현대적으로 변형해 간편화했다는 것, 무엇보다 전 세계적 유행인 글루텐 프리 식품이라는 것 등 네 가지 이유를 꼽는다.
밥은 언제나, 여전히 한식의 중심에 놓인다. 식문화가 다양화되며 위상이 위협받고 있지만 더 맛있는 밥에 대한 탐구는 되레 더 활발해졌다. 밥을 벗어나 쌀을 바라보면 더욱더 발전 여지가 많아진다. 맛 좋은 쌀이 맛 좋게 소비될 수 있다면 쌀 관련 산업이 풀 죽을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쌀 소비 형태 변화의 격류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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