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상업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이탈리아가 독점하고 있던 동양과의 원격지 상업을 독자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후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다시 영국과 네덜란드에 의해 승계됨으로써 상업혁명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행 설립해 국제금융거래 장악
이러한 상업혁명의 내용으로, 그 첫 번째는 상업의 중심지가 지중해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후적으로 볼 때,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으로 상업의 중심이 이동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두 번째는 원격지 상업의 대상지역이 ‘세계’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 이전에는 원격지 상업의 중심축이 유럽과 아시아였으나, 이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하게 됨으로써 사실상의 세계무역이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상업혁명의 세 번째 내용으로는 원격지 상업의 대상지역이 세계로 확대된 당연한 결과이지만 교역상품 역시 다양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혁명적 상업의 발달 속에서 그 기회를 가장 먼저 포착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국토의 대부분이 저지대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산보다는 교역에 눈을 돌렸다. 특히 대서양 연안에서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지정학적 조건은 네덜란드에서 상업발달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말 영국과 함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네덜란드는 이미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를 훨씬 앞서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동방과의 교역에 있어서도 지배적 지위를 갖는 회사였다. 동방과의 교역에 있어서 네덜란드가 17세기에 이미 유럽에서 압도적 지위를 확보했던 것은, 이들이 일본과 정기적으로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귀화인 박연이 등장하고, 또한 하멜은 유명한 표류기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네덜란드가 영국에 앞서 유럽 원격지 상업의 중심적 역할을 한데에는 국제금융시장을 장악하고자 했던 정부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암스테르담은행의 설립과 발달이 그것이다. 암스테르담은행은 암스테르담시의 지원 아래 1609년 설립되었다. 국책은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당연히 민간기업으로 설립되었지만 암스테르담시가 은행거래에 대한 보증을 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규정을 통해 은행의 영업을 도왔다는 측면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보증, 은행화폐 도입한 최초의 근대적 은행
중세 이후 금, 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통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해서 거래에 커다란 비효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암스테르담은행에서는 계좌를 가진 상인으로부터 금, 은을 예치받고, 이를 근거로 계좌의 주인이 금, 은을 주고받지 않고도 다른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은행화폐(오늘날의 수표와 비슷한 개념으로서의 돈)라는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는 거래에 있어서의 효율성 뿐 아니라, 도둑,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고, 더구나 암스테르담 시 정부가 그 지급을 보증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은행은 매우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600길더 이상의 거래는 반드시 은행화폐를 통해 거래를 하도록 하는 규정이 도입되면서 대규모 상인들은 반드시 암스테르담은행에 계좌를 개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암스테르담은행의 발달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암스테르담은행은 이후 독일 등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본보기 은행이 되었고, 17세기와 18세기에 걸친 네덜란드 상업발달의 중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