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우리나라 기업생태계는 실로 보잘것없었다. 대기업이라고는 시멘트·섬유·비료 등 소수의 업종에 몇 개 존재했을 뿐이다. 그밖에 낙후된 전통적 기술에 의존하는 여러 중소기업들이 산재해 있었다. 오늘날 크게 확대된 한국의기업생태계는 전적으로 지난 반세기의 고도성장이 이룩한 성과다.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은 결국 유능한 기업가를 발굴해 이들에게 근소한 국가 자원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선별 기업기원정책이었다. 현재의 재벌주도적 기업생태계는 그 직접적 성과다. 대기업과 달리 집중적 지원을 직접 받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주도의 경제성장이 불러온 호황에 기대어 성장해 왔다. 그러나 소위 ‘낙수(trickledown) 효과’의 간접적 혜택을 누리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급성장한 대기업들에 비하면 중소기업들의 성장속도는 매우 느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역량 차이도 크다. 초거대기업 IBM을 꺾고 시장을 제패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나 인텔 같은 중소기업들의 출현을 기대할 만한 기업생태계가 아니다. 한국경제가 ‘따라잡기’를 끝내려면 중소기업 부문의 발전에 더 힘을 기울여 선진국형 기업생태계를 창출해야 한다.
현 기업생태계에서 한국의 중소기업들은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과의 경쟁이 힘에 겹다. 중소기업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 없지는 않으나 과거 정부의 집중지원속에 이미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대기업과 맞서는 데 충분한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도 결코 공정한 경쟁은 아니며 성공적 경제개발이 불러온 부작용일 뿐이다. 선별기업지원정책은 분명히 반시장적이었지만 단기간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을 육성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지원을 받은 수많은 기업들이 실패하는 가운데 성공한 소수가 현재의 재벌 대기업들이다. 이들의 주도로 한국경제가 안정적 성장궤도에 진입하면서 선별 기업지원정책은 시의적절하게 폐지됐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공정성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대기업의 경쟁적 우위는 과거 개발정책의 목표였다. 이것을 부정하면 이미 성공한 개발전략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진다. 그러므로 대기업의 우위는 그대로 인정하고 중소기업들이소규모의 이점을 살리면서 경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다. 어떠한 철옹성에도 취약점은 항상 있기 때문에 창의적 혁신에 주력하면 중소기업도 훌륭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
| 고유업종정책보다는 중소기업 연대 촉진으로 활로 찾아야
대규모 생산이 유리한 상황이라면 중소기업들이 연대하여 대처하는 것이 해법이다. 연대가 잘 안 될 때 정보와 유인을제공해 막힌 곳을 뚫도록 돕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대기업이 신생기업들의 혁신적 기술을 인력 스카우트 등의 우회적 방법으로 탈취해가는 횡포도 근절해야 한다. 정부가 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중소기업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내세워 소비자 선택을 제한하는 부당한 정책을 강요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을 지정하여 대기업의 해당 업종 진출을 금지하는 ‘중소기업 고유업종정책’이다.이 정책은 한 번 시행하다가 폐지되었는데 최근 동반성장 분위기를 타고 다시 부활하고 있다. 동네 빵집과 골목상권을 위해 ‘파리바게뜨’와 대형마트의 입점을 제한한 것이 그 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경쟁의 공정성을 말할 때 흔히 플라이급 링에 오르는 헤비급 선수를 예로 든다. 제빵업계는 플라이급의 무대인데 ‘파리바게뜨’는 헤비급 선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 매장 규모를 보면 ‘파리바게뜨’나 동네빵집이 서로 다를 바 없다. 대형 체인은 핵심 생산과정만 본사에서 통합 운영하고 최종 제빵과정은 각 매장에 맡긴다. 원료를 대량 구입함으로써 구입원가도 절감한다. 대형 체인의 운영기술을 아무도 터득하지 못하던 과거에는 제빵산업은 분명히 플라이급 무대였다. 그러나 ‘파리바게뜨’형 체인점이 동네빵집을 압도하는 현실은 상황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이처럼 기술이 발전하면 플라이급 무대도 헤비급 무대로 바뀌는데 이 변화를 거부하면 사회발전만 지체될 뿐이다.
정부지원 아래 이미 지위를 굳힌 대기업과 맞서야 하는 중소기업들을 합리적으로 돕지 못하면 기업생태계의 건강한 발전은 어렵다. 그러나 ‘중소기업 고유업종정책’ 처럼 대기업과의 경쟁을 아예 차단하는 정책은 옳지 않다. 고유업종정책을 불가피하게 시행하더라도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을 배양하는 정책과 함께 한시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소기업들로 하여금 경쟁력은 키우지 않으면서 보호에만 안주하도록 오도할 뿐이다.
| 하도급거래의 모기업 횡포는 징벌적 배상제로
한국 기업생태계의 또 하나의 문제는 부품을 대기업에 납품하는 하도급 중소기업들에 대한 모기업의 횡포다. 자신만의 전용부품을 납품 받는 모기업은 수요독점 기업이다. 시장원리에 따라 여러 하도급기업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가장 싼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달리 납품할 곳이 없는 하도급기업의 약점을 악용할 수도 있다. 납품가를 더욱 후려치고불리한 거래조건을 강요하는 모기업의 횡포는 큰 문제다.
하도급거래 관행 역시 기업생태계의 진화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개발 초기에 우리나라 수출기업들은 핵심 부품은 일본 등지에서 수입하고 나머지 일반 부품들은 자체 제작하거나 외부로부터 납품받았다. 중소기업들의 기술력이 크게 미흡한 탓에 수출대기업들은 하도급 부품을 기피했고 그 결과 안정적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제대로 된 장기 생산설비조차 갖추기 어려웠다.
하도급 중소기업들의 역량을 배양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 ‘중소기업 계열화 촉진법’이다. 계열화정책은 업종과 품목을지정하여 자금을 지원하면서 대기업이 국내 하도급 중소기업들과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부품을 납품받도록 유도했다. 때마침 대기업 내부 임금이 높아지면서 중소기업 부문의 저임금이 던지는 매력도 커졌다.
중소부품업체들이 장기계약을 통해 안정적 시장을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하도급체계는 수준급 부품을 납품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도급 부품의 품질이 좋아지자 이제는 모기업들이 장기 전속계약을 강요할 정도다. 부품기업이 여러 대기업에게 다양한 부품을 공급할 수준까지 발전하면 우리의 기업생태계도 선진국형에 근접할 것이다. 모기업이 대금지불과 제품인수를 제멋대로 일방적으로 지연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하도급기업의 몫이다.
그런데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하려면 납품거래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현행 ‘보상적 배상(compensatory damage)제도’는 배상금액을 가해금액으로 한정하므로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오히려 손해볼 수가 있다. 이 경우 중소기업으로서는 소송을 포기하고 피해를 감수하는 편이 오히려더 낫다. 피해자가 스스로 법적 보호를 포기하는 법치의 사각지대에서는 모기업의 횡포가 상습적으로 자행된다. 이 사각지대를 해소하려면 피해액보다 훨씬 더 많이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배상(punitive damage)제도’가 필요하다.징벌적 배상제도는 피해 중소기업이 거리낌 없이 모기업의 횡포를 고발하도록 유도할 것이고, 이 사실을 잘 아는 모기업은 스스로 횡포 자행을 자제할 것이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shoonlee@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