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기나 물처럼 우리 주위에 흔하게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돈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스럽게 사용하지만 그 기능이나 중요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은 별로 없다. 그냥 물건을 살 때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화폐에는 여러 중요한 기능이 있는데, 교환의 매개 및 가치척도의 기능과 더불어 화폐가 가지는 중요한 기능으로 가치저장(store of value) 기능을 들 수 있다.
| 화폐, 현재의 만족을 미래로 옮긴다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영희가 아이스커피를 즐기고 있다. 영희의 머릿속에 문득 ‘이 시원한 아이스커피로부터 얻는 만족을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에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몇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선 물리적으로 아이스커피를 보관하는 방법이다. 얼른 집으로 가서 아이스커피의 얼음은 냉동실에, 커피는 냉장실에 보관하면 된다. 그런데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냉장고라고 하더라도 커피를 한 달이나 보관해도 괜찮을지 걱정이다. 상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맛이 지금과 다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보관이 쉬운 다른 물건을 사두었다가 커피가 먹고 싶을 때 그 물건을 팔아서 아이스커피를 사 먹는 방법은 어떨까? 이 방법이 가능하려면 원하는 때에 그 물건을 즉시 처분하여 제값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물건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또 다른 방법으로, 영희가 자신이 즐겨 가는 카페에서 아이스커피 교환권을 사 놓으면 어떨까? 교환권을 가지고 있다가 커피 생각이 날 때 커피와 바꾸는 것이다. 커피를 냉장고에 저장하거나 다른 물건을 사 놓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생각으로 보인다. 그런데 교환권은 구매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다른 카페에서는 그 교환권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필시 속으로 ‘아니, 무슨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하는지 모르겠네. 커피 마시고 싶을 때 아무 데서나 돈 주고 사마시면 되지.’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돈을 잘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재화와 교환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이다. 미래에 소비하기를 바라는 재화나 서비스가 있을 때, 그것을 지금 사서 보관할 필요 없이 돈으로 저축해 놓았다가 나중에 원하는 것을 구입하면 된다. 즉, 화폐를 이용해 현재의 부를 미래의 부로 옮겨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 없으면 불편해
화폐에 가치저장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큰 불편을 겪게 된다. 비현실적이지만 김밥이 화폐로 쓰이는 가상적인 나라를 생각해 보자. 김밥은 금방 상하기 때문에 그 전에 빨리 그것으로 다른 물건을 사야 한다.
지금 당장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사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산 물건들 중 일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어 쓸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축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다음 달에 많은 지출이 예상되어도 그에 대비해 미리 저축을 할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불편한 노릇이다.
위의 예는 화폐가 가치저장 기능을 가지려면 그 가치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아야 함을 암시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면 가치저장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정부가 발행하는 본격적인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는 조개껍질, 돌, 금속, 베, 곡식 등과 같은 것들이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이런 물건들은 모두 내구성이나 보존성이 좋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반면 지폐와 같은 법화(legal tender)는 금속이나 곡식과 같이 내재적인 사용가치를 가지는 실물화폐(commodity money)와 달리 그 자체로는 사용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대신 정부가 그 가치를 보증한다. 단, 정부가 가치를 보증해 준다고 해서 일정액의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의 양까지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물가가 오르면 화폐의 가치는 떨어진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남태평양의 얍(Yap)섬의 사례이다. 얍섬은 둥글게 다듬은 큰 석회석을 돈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세기 말 한 미국인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얍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돌로 만든 돈을 보고 사업 아이디어를 얻어 몇 년 후 다량의 석회석을 싣고 이 섬을 찾아 그것으로 물건을 샀다. 이로 인해 돌로 만든 돈의 가치가 급락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모두가 전보다 돈을 많이 갖게 되었지만 돈의 가치가 폭락한데다가 이미 많은 물건을 그 외지인에 팔아버린 후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전보다 가난하게 되었다.
무리하게 화폐 발행을 증가시킨 경우 예외 없이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다. 돈으로 땔감을 사는 것보다 돈을 태우는 편이 더 이익이었으며, 아이들은 장난감 대신 돈 뭉치를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21세기 짐바브웨에서도, 돈의 가치가 글자 그대로 휴지 조각만도 못하게 되어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휴지 대신 돈을 쓰는 일까지 발생했다. 휴지 대신 돈을 사용하지 말라는 화장실의 경고문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화폐의 가치 하락은 거래의 매개 기능에도 문제를 일으키지만, 가치저장 기능도 크게 악화시켜 화폐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정부의 과도한 화폐 발행의 해악이 매우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이상의 논의는 가치만 제대로 보존되면 돈이 아닌 부동산, 귀금속, 보석, 미술품, 주식이나 채권 같은 금융자산 등도 얼마든지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령 유명 화가가 사망하면 그 작가의 작품 가격이 급등하는 것처럼, 이런 자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오르기도 한다. 주식처럼 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문에 위험을 내포한 금융자산은 가치저장 기능이 제한적이다.
결국 화폐를 통해 가치를 저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미래 소비의 증가에 있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미래에 화폐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은 결국 교환의 매개 기능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김광호 한양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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