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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경제교육(종간)
근대 이행기 시장과 상업의 역사적 특질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조교수 2014.04.29

국제무역을 제외하면, 조선 후기의 국내 상업은 3층의 위계(hierarchy)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하층에 있었던 시장은 전국 팔도의 곳곳에 들어서게 된 장시(場市)였다. 주기적으로 개설되었으므로 정기시장(periodical market)에 해당한다. 5일마다 장에 나오는 농민들과 그들이 지참한 농가 부산물은 장날 풍경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농업 생산에 종사함과 동시에 수공업을 행했다는 점에서 반농반공(半農半工)이면서, 상행위를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반농반상(半農半商)이었다.


| 근대 이행기에 상무사로 변모한 행상

시골의 5일장에서 주역을 담당한 것은 전업적(專業的) 상인이었던 장돌뱅이였다. 장과 장을 오가며 돌아다닌다는 의미에서 장돌림이라 하였는데, 조금 더 고상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행상(行商)이다. 보따리에 물건을 싸 들거나 머리에 이고 다녔던 봇짐장수, 지게를 이용해 물건을 지고 다녔던 등짐장수 등에 대해 일찍이 소설가 황석영은 ‘그 신세가 부평초와 같고, 종적이 바람 같다. 집도 없고 처도 없는 것은 물론이요, 동에서 먹고 서에서 자다가 길에서 병이 나도 구해줄 이가 없다.’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었다면 서로 뭉치는 편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층민이었던 행상 상호간의 교류나 공동체 구성 등에 관한 명확한 증거를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는 무척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 관(官)과의 관련 속에서 지역별로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고,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상무사(商務社)로 변모하였다는 점이다. 상무사는 그 명칭과는 달리 순수한 상인 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지역의 유지가 참여하는 비중이 컸고, 중앙의 정치권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 포구 여객주인, 위탁매매와 금융서비스 제공

장시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던 거래 장소는 포구(浦口)였다. 전국 각지의 해안이나 강안에 위치한 포구에서는 해운(海運)이나 강운(江運)을 통해 국지적 물류가 전국적으로 연결되었다. 수운(水運)에 종사한 선상(船商)은 대규모 물화를 가득 싣고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고, 특정 포구에서 오랜 기간 동안 눌러 앉아 소비자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포구마다 여객주인(旅客主人)이라는 서비스 종사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선상에 대한 접대, 즉 숙박 및 음식의 제공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들이 맡기고 간 각종의 물자를 대신 판매해 주는 위탁 매매를 주업으로 하였다. 수수료 격인 구문(口文)은 대개 거래가액의 10% 정도였다. 선상이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여객주인의 수중에는 다량의 현금이 있게 마련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대부업이나 어음 발행 또는 환(換) 업무와 같은 금융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었다.

전국에서 가장 큰 포구는 역시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漢江)의 일부인 경강(京江)에 있었고, 대표적인 곳이 바로 마포(麻浦)이다. 각지의 미곡, 즉 쌀을 서울로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상인을 경강상인(京江商人)이라고 하며, 선상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이들에 대한 각종 서비스의 제공을 독점한 자들을 경강주인(京江主人)이라 하며, 역시 여객주인의 일종이었다. 경강주인을 비롯한 여객주인은 꽤나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 여객주인으로서의 권리가 일종의 유가증권(有價證券)으로서 매매되기에 이르렀다. 해당 권리를 왕실의 하부 기관에서까지 매입하여 모았을 정도로 조선후기의 각광받는 투자 상품이었다.


| 독점권을 가진 대신 국역의 의무를 진 시전 상인

3층의 위계에서 가장 위에 있었던 것은 서울의 시전(市廛)이었다. 정부 관서인 평시서(平市署)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시전의 목록과 취급 물품의 종류가 시안(市案)에 기재되었다. 등록된 시전은 담당 물종을 배타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가졌고, 그 대신에 정부나 왕실 등에 물품을 조달해야 하는 진배(進排)와 부역을 제공해야 하는 국역(國役)의 의무를 졌다. 조선후기 시전의 종류는 100가지가 넘는 정도였고, 각 시전은 특정의 물종을 취급하도록 분화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종로 사거리에 집중되어 있었던 육주비전(六矣廛; 육의전)이다. 육주비전이라고 해서 여섯 가지 시전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한 선전(立廛), 무명을 취급한 면포전(綿布廛), 국내산 비단을 취급한 면주전(綿紬廛), 종이를 취급한 지전(紙廛), 모시를 취급한 저포전(苧布廛), 삼베를 취급한 포전(布廛), 모자를 취급한 청포전(靑布廛), 건어물을 취급한 내어물전(內魚物廛)과 외어물전(外魚物廛) 등의 주요 시전을 여섯 개의 주비로 묶은 것으로서, 어떻게 묶느냐는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주비는 진배나 국역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일종의 납세 단위로 추정된다. 대개의 시전은 정해진 멤버들로 구성되는 조직인 도중(都中)을 운영하였다. 도중의 멤버는 영업의 이익을 분배받는 일종의 지분으로서 깃(衿)을 나눠 가졌다. 마치 현대의 주식회사에서 배당의 기준이 되는 주권(株券)과 같은 개념인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실제로 영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 깃을 보유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장시 · 포구 · 시전이라는 조선후기 상업의 3개 층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리해 볼 때, 아주 중요한 공통점 한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상인이 아닌 사람이 상인 조직에 참여하거나, 영업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영업의 권리를 누리는 경우가 일반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상업은 본업(本業)인 농업에 대비되는 말업(末業)으로서 그다지 인기 있는 부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업이나 서비스업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전환기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상행위에 실제로 가담하지는 않으면서 상행위의 과실은 손쉽게 취하고자 여러가지 시도가 나타났다. 장기간에 걸친 위기의 시대가 도래하자 당시의 기득권층이 기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각종 권리를 집적하려 하였고, 그러한 시도의 결과로 나타난 자산 포트폴리오(asset portfolio)의 다변화 현상 속에, 상업에서의 각종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 전통적 상인이 생산과 유통의 전체 과정을 장악함으로써 자본가로 변신하게 된다는 근대 이행의 이론은 들어맞기 어렵다. 상인이 조직한 공동체가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게 된다는 식의 신(新)제도학파적 설명이 적용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근대 이행기에 관찰되는 이러한 역사적 특질은, 전통적 상업이나 서비스업을 담당한 자들이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변신하기 어려웠던 사정을 잘 보여준다.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조교수
cho06@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