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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경제교육(종간)
잡세(雜稅)에 나타난 조선후기 조세제도의 경직성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조교수 2014.05.30

‘월급쟁이는 봉’이라는 표현은 이미 진부해져 버렸다. 월급쟁이에게 매달 급여명세서에 기재되는 원천징수 내역은 어찌할 수 없는 유리알 같은 지갑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소위 ‘갑근세’라 칭하는 갑종(甲種)근로소득세는 마치 현대 한국에서 조세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재산세,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의 다른 세목(稅目)에 비해 그 체감의 정도가 훨씬 높기 때문일 것이다.


| 무명잡세로 괴로웠던 사람들

그런데 갑근세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개인소득세가 이 땅에서 신설된 지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다는 점은 일반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1934년 조선에서 제도화되었으니, 2014년 현재를 기준으로 역산해 보면 꼭 80년 전의 일이다. 다시 말해, 90년 전이나 100년 또는 그 이전의 월급쟁이에게는 원천징수를 당할 일이 전혀 없었다. 소득세가 없었던 당시의 대표적 세금은 지세(地稅)였다. 조선전기와 달리 조선후기에는 17세기의 대동법(大同法)이나 18세기의 균역법(均役法) 등 조세체계의 재편이 있었고, 그러한 일련의 개혁적 조치에 따른 결과로서 조세의 부과 대상이 인신(人身)이 아닌 토지로 집중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조세체계에서 지세가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현상에 불과했고, 그 이면에서는 각종의 무명잡세(無名雜稅)가 백성들의 삶을 괴롭혔음이 익히 알려져 있다. 무명잡세란 국가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은, 즉 명목이 없는―또는 명분이 없는―갖가지 세금을 가리킨다. 그와 연관하여 자연스럽게 탐관오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지세라는 제도상의 대표적 세목과 무명잡세라는 제도 밖의 악명 높은 현실 사이에 또 다른 여러 가지 세목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취된 잡세(雜稅)였다.


| 대표적인 잡세인 수산세(해세)

잡세라는 표현은 단순히 ‘잡다한 세금’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부터 소위 조·용·조(租庸調, 지세, 신역, 공물)가 아닌 것을 일괄하여 잡세라고 한 바 있다.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세가 아닌 제도상의 거의 모든 조세를 잡세라 일컬었다고 볼 수 있다. 무명잡세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정규의’ 잡세라 할 수도 있겠다.

잡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수산세(水産稅)에 해당하는 해세(海稅)였다. 해세는 ‘어염선곽세(漁鹽船藿稅)’라고도 하는데,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곽세(藿稅) 등을 통칭하는 것이다. 어세는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어살이나 그물 등의 설비 또는 도구에 대해 부과한 세금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고기를 얼마나 잡았는지(생산량)가 아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수단(자본재, capital goods)의 보유량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염세는 소금의 생산과 관련된 세금이었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천일염 방식의 염전을 갖춘 것이 아니었고 소금물을 쇠나 흙으로 만든 가마솥에 부어 넣고 끓여서 소금을 얻었기 때문에, 염세의 부과 대상은 소금가마라는 생산설비였다. 역시 어세와 마찬가지로 소금의 생산량이 아닌 소금 생산을 위한 자본재에 대해 부과하는 것이었다. 배에 부과한 세금인 선세 역시 배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매긴 것이지 해당 배의 실제 선적량 또는 적재량과는 무관했다.

어세·염세·선세보다 현대인에게 훨씬 낯선 곽세라는 세금은 미역(藿)의 생산과 관련된 세금이었다. 바다 속의 미역밭(藿田)에 대해 부과한 세금으로서, 역시 미역의 생산량과는 관계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김(海衣)의 생산과 관련된 세금으로서 바다 속의 김밭(海衣田)에 부과한 해의전세라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해세의 모든 명목에서 생산량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모든 해세는 현대의 재산세와 다름없었다.


| 무녀·장인에게는 인두세 부과

조선후기에 있어서 해세 외에 주목할 만한 잡세로는 장세(匠稅)와 무세(巫稅)를 들 수 있다. 장세는 대장장이나 옹기장이와 같은 전문적인 수공업자에게 부과한 세금이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전국 팔도 중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에만 적용되었다.

1명당 무명 한 필씩을 납부하게 되어 있었으니, 일종의 인두세(人頭稅, poll tax)였다. 무세는 무당에게 부과한 세금으로서 무녀세(巫女稅)라고도 했다. 역시 1인당 무명 한 필씩의 인두세였고, 함경도 일부 지역에 대해서는 무명 대신에 삼베를 걷었다. 장세나 무세의 사례에서도 수공업자의 제품 생산량이나 무당이 행하는 굿이라는 ‘서비스’의 제공 여부와 해당 세액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인두세는 명목이었을 뿐이고 실제로 장인이 몇 명인지 무당이 몇 명인지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다. 최근 진행된 실증 연구에 따르면, 장세와 무세는 지역별로 일정액을 할당하여 수취하는 형태의 ‘비총제(比摠制)’ 방식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 국가의 재분배 기능 작동 어려워

이상에서, 해세, 장세, 무세 등의 제도화된 잡세에서는 정률(定率)이 아닌 정액(定額)의 형태로 세금의 부과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생산 및 유통의 실정을 감안컨대 주어진 생산설비나 도구를 활용하여 생산량을 크게 늘리거나 줄일 수는 없었고, 이에 세액의 최초 결정 과정에서 평균 생산량이 고려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액세의 형식을 띠었지만 그 속에는 정률세 부과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세액이 최초에 결정되던 당시의 생산성이 이후에도 장기적으로 안정적일 수는 없었다. 반면에 중앙정부로 상납된 잡세의 총량은 장기에 걸쳐 거의 변동하지 않고 굉장히 고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다시 말해, 세액과 그 명목이 장기에 걸쳐 경직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일부 세목에서 19세기 들어 수취액의 감소가 관찰되는 정도였다. 이는 중앙정부가 세출의 필요에 의해 세입을 유지하고자 한 실리 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기존 세금의 명목을 어떻게든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명분’ 추구의 결과였다.

중앙에서 조세제도를 경직적으로 운영하며 명분을 고수하는 동안 국가의 재분배(redistribution) 기능은 원활히 작동되기 어려웠고, 이에 지방 차원에서 각종의 무명잡세의 징수가 남발되는 상황은 그저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조교수
cho06@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