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경제 체제가 경제를 조직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문제의 중심을 가치의 척도인 화폐에 두지 말고 화폐에 의해 생산되고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두면 우리는 전혀 다른 해결책을 만나게 된다.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고, 경제와 환경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지속가능한 사회와 행복한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데 지역화폐가 기여할 수 있다. 지역화폐를 통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 지역화폐, 회원 간에 돈 없이 재화와 서비스를 주고받는 시스템
지역화폐를 통하여 사람들은 모두를
경쟁자가 아니라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게 돼
지역화폐 거래체계는 레츠(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를 번역한 용어로, 회원 간에 돈 없이 재화와 서비스를 주고받는 시스템이다. 지역화폐에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타임 달러(Time Dollar)나 화폐를 직접 발행하는 이타카 아워(Ithaca Hour)도 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운영되는 레츠 방식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일반화폐는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지만 지역화폐는 일정한 지역에서 회원 간에만 사용이 가능하다. 지역화폐는 대부분 컴퓨터상에서 회원 계좌에 수치로만 나타난다. 화폐 형태라도 이를테면 녹색가게에서 발행하는 교환권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품앗이, 두레와 같은 우리 전통의 개념에 현대적 컴퓨터 시스템이 결합한 형태가 지역화폐라고 볼 수 있다.
지역화폐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며 이해집단·세대·계급 간 장벽을 허무는 역할도 한다. 또한 지역화폐를 통해 지역 내 거래를 활성화하면 복잡한 유통단계를 거치며 나타나는 에너지 낭비와 폐기물 발생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물건을 소비할 때 지구상 어딘가에 생태적 발자국을 남긴다. 지역 내 거래가 활성화되면 생태적 발자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환경오염을 적극적으로 막을 수 있다.
지역화폐는 문화적이며 인간적인 측면도 있다. 지역화폐를 통하여 사람들은 모두를 경쟁자가 아니라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게 된다. 지역화폐에 참여하는 사람은 저마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
| 지역화폐, 1983년 캐나다에서 처음 등장
우리나라에선 1998년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 모임’이
미래화폐란 이름으로 거래 시작
지역화폐는 1983년 캐나다 밴쿠버의 코목스 밸리에서 공군기지 이전과 목재업 침체로 실업률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마이클 린튼(Michael Linton)이 처음 도입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지역화폐 거래관리 시스템인 레츠를 개발한 그가 녹색달러라는 지역화폐를 만들어 회원으로 가입한 지역주민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서로 교환하게 했다.
1987년에는 레츠가 캐나다 여러 곳에서 생겼고, 이후 영국과 호주로 확대되었다. 1990년대 들어 급속히 보급되었으며 21세기 들어 호주, 캐나다, 영국, 미국, 일본 등의 국가를 중심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의 지역화폐가 대부분 경제 불황기에 유행을 하다가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서 사라졌으나, 현대의 지역화폐는 경제상황과 상관없이 지속적인 확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마을공동체 및 생태운동과 결합하면서 대안적 삶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화폐가 1996년 녹색평론이란 잡지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IMF 구제금융체제가 한창이던 1998년 3월에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미래화폐란 이름으로 지역화폐 거래를 시작한 이후 대구 로타리클럽, 구리 YMCA 등에서 운영되었다. 대구 중구청 지역활성화센터의 지역화폐, 서울시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의 송파 품앗이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도입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역화폐 시스템인 대전 한밭 레츠의 회원은 ‘두루’로 거래한다. 어린이 양육의 사회화에 대한 관심에서 ‘공동육아’를 시도했고, 의료부문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민들레 의료생활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두루 부엌’을 통해 먹거리 개선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안학교인 ‘꽃피는 학교’도 개교했다. ‘이동영화관 상영’, ‘민들레 간병 도우미’, ‘나눔 두루장터’ 등의 사업도 펼치고 있다.
| 서울 e품앗이 중 은평구가 가장 모범적
한국어배움터, 아이들 독서클럽, 영어회화 등
다양한 소그룹이 운영 중
서울 e품앗이는 서울시 복지재단 산하 서울 e품앗이 센터와 각 커뮤니티 운영자 간에 협의체를 구성해 운영되고 있다. 2010년 11월에 노원·양천 2개 자치구가 시범사업을 시작한 후 현재 금천구·강남구·마포구 등 13개 자치구가 e품앗이를 운영하고 있다. 돌봄, 학습지도, 상담, 수리, 이·미용 등으로 이루어진 품과 식품·의류·도서·음반·장난감 등으로 구성된 물품이 거래된다.
서울 e품앗이에서는 회원끼리 가상화폐로 품·물품을 거래한다. 회원 가입 시 1인 1계좌를 부여하고, 거래 당사자 간 가격결정 및 거래 후 통장과 홈페이지에 거래결과를 기록하며, 지역 품앗이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서울 e품앗이 중 은평구가 가장 모범적이다. 은평구 e품앗이 사업은 2011년 5월 시작됐다. 통기타, 한국어배움터, 아이들 독서클럽, 영어회화 등 다양한 소그룹이 운영 중이다. 회원은 2,138명, 오프라인 가맹점은 58개다. 서부병원·안경점·미용실 등의 가맹점에서는 이용 가격의 10~30%를 문(e품앗이 화폐단위)으로 계산한다. 총 거래 수는 4,779건에 이른다.
이창우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lcwsdi@si.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