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정부는 국가를 운영하고 여러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다양한 세금을 거두고 있다. 근로 및 사업소득에 대한 소득세, 법인의 소득에 대한 법인세, 재화의 생산이나 용역의 제공 과정에서 새롭게 더해지는 이윤에 대한 부가가치세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담배나 술과 같은 특정한 상품의 거래에 부과되는 세금도 있고, 자동차나 부동산 등 보유재산의 가치에 비례하여 정기적으로 세금을 내기도 한다. 재산을 상속이나 증여할 때에도, 새롭게 재산을 취득하여 관청에 등록할 때에도 법에 따라 이런저런 세금이 발생한다.
그런데 오늘날 주로 징수되는 세금의 기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소득세가 본격적으로 걷히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부터였다. 법인세 역시 20세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부가가치세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활용되기 시작했으니 주요국에서 그 역사가 채 몇 십 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금 자체의 역사는 인류가 공동체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아주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어떤 세금을 거두었을까?
| 징수 초기에는 걷기 쉬운 세금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
과거에는 세금 징수를 위한 전문 인력과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세련된 기법도 없었다. 이 시절 정부는 기본적으로 징수하기 쉬운 세금을 거두어 국가 재정을 마련하였다. 대표적으로 관세와 통행세를 예로 들 수 있다. 지금과 달리 교통과 물류의 수단이 상당히 제한되었던 시절에 육상교통은 몇 개의 정해진 길을 따라서만 이루어졌고, 해운 역시 주요 거점 항구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이 때 주요 항구와 도로에 관문을 설치하여 잘 관리하면 대부분의 물자와 인력 이동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세(稅) 수입 중 관세와 통행세의 비중이 상당하였다. 예를 들면 1700년 영국 정부의 총 재정수입은 434만 파운드였는데, 그 중 약 35%인 152만 파운드가 관세 수입이었다.
재정이 부족할 때에는 징수가 용이한 새로운 세금을 만들었다. 주로 납세 능력이 되는 부유한 이들이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면서 눈에 잘 띄는 항목들에 다양한 물품세가 부과되었다. 교회 첨탑, 집의 너비, 창문, 가발, 턱수염은 물론 애완동물과 벽돌에 세금이 부과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공식 서류에 정부로부터 구입한 인지(印紙, stamp)를 반드시 부착하도록 정하기도 했고, 복권을 판매하여 재원을 마련할 때도 있었다.
| 시간이 지날수록 납세자의 조세회피나 조세저항 발생
재산세 · 토지세는 징수 어려워 대납 횡행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세금은 꾸준히 안정적인 재정 수입을 보장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교회의 첨탑을 미완성인 상태로 놔두거나, 주택을 좁고 길게 건축하는 식의 다양한 조세회피 수단을 이용해서 세금을 적게 내려고 노력했다.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대해 부정적인 효과도 나타났다. 벽돌과 같은 자본재에 대한 세금이나 상거래에 수반된 인지세는 거래비용을 높여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저해하였다. 복권을 발행하면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후 술이나 담배와 같은 기호품들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였지만, 기호품의 소비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며 조세 저항도 함께 커졌다.
사실 예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과세 항목은 재산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재산 중 토지가 가장 눈에 잘 띄고 대표적이었으므로, 재산세는 토지세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재산세 또는 토지세는 결코 징수하기 용이한 세금이 아니었다. 재산세는 먼저 재산의 가치를 결정한 다음, 정해 놓은 세율을 적용하여 세액을 산출하여 부과하게 된다.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토지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황에서도 특정한 토지의 단위 면적당 가치를 평가하여 정하기란 쉽지 않은데, 예전에는 어려움이 더 컸다. 매년 풍흉에 따라 달라지는 산출을 예산 수립 시점에서 미리 예상하여 세액을 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지주가 생산력이 높고 질 좋은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토지를 소규모 자영농들이 나누어 갖고 있는 경우, 토지 가치의 측정과 세율의 적용이 늘 공평무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거두어야 할 세금의 액수를 정한 이후에 실제로 징수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지방 행정조직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던 시절에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다니며 수많은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종종 거두어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되기도 했다. 화폐가 아닌 현물로 세금을 납부하던 시절에는 이러한 비용이 더욱 컸다. 따라서 지방 정부나 토호, 상인들에게 세금의 징수 권한을 넘기고 대신 일정액을 상납 받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다. 몇몇 지역에서는 나중에 전문적인 징세업자들이 등장하여 정부의 과세 업무를 대행하였다.
이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는 인두세를 징수하기도 했다. 재산세와 마찬가지로 인두세의 역사 역시 로마제국 이전의 고대 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 하지만 개인의 납세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동일한 부담을 지우는 인두세는 대중의 반발로 이어지기 쉬웠고, 폭동과 반란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한편 인두세를 징수하기 위해서는 주민의 거소 현황을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센서스’라 불리는 인구주택 총조사가 역사 속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다양한 세금이 역사적 상황의 변천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반복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조세 수입이 확보되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세금의 부과와 징수는 징세비용을 줄여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징세비용을 계산할 때에는 세금을 거두기 위한 직접적인 비용뿐만 아니라 조세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고려한 간접적인 납세 협력비용도 함께 감안하였다. 따라서 역사적 상황의 변천에 따라 시대별로 다양한 세금들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였다.
징세에 수반되는 간접비용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을 때 무리한 과세는 반란과 폭동, 더 나아가 정부의 전복과 국가의 붕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후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며 근대 국가가 수립되고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자 과세 대상과 부과 방식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며 징세에 수반되는 간접비용이 감소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경제 성장에 따라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나고, 세무를 전담하는 전문 조직과 인력이 등장했다. 보다 효율적인 과세행정 기법이 개발되며 납세 행정 및 협력비용이 크게 감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이후 복잡하고 다양한 세금이 새로 도입되어 국가 재정의 규모를 키우는 데에 기여하게 된다. 한편 직 · 간접적인 징세비용과 조세가 개인 및 기업의 경제활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를 함께 줄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고 선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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