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납세의 의무를 진다. 국가를 운영하고, 정부의 여러 정책과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상적인 경제활동 속에서 사람들은 소득세·부가가치세·법인세 등 수많은 종류의 세금을 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금을 걷기란 쉽지 않다. 당장 근로자의 봉급에 대한 소득세만 하더라도 징수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다. 세무 당국은 우선 매달 월급에서 미리 정한 산식에 따라 일정 금액을 원천 징수해 둔다. 그리고 이듬해 정초가 되면 납세자별로 실제로 냈어야 할 세금의 총액을 법에 따라 다시 계산한 뒤, 미리 내어 둔 금액과 비교하여 차액을 정산하는, 이른바 근로소득 연말정산이란 과정을 거친다. 납세자들은 까다로운 법률을 따져가며 계산하고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정산 서식을 작성하느라 부산하고, 세무 당국은 수많은 납세자들의 서로 다른 사안들을 처리하느라 바빠진다. 근로소득세 말고도 법인세·부가가치세·관세·증여세 등 법에 따라 거두어야 할 서로 다른 세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오늘날 국민들 중에 나라에서 세금을 잘 거두어 살림을 무난히 꾸려 나갈지 걱정하는 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국세청 · 관세청 및 각 지방자치단체의 세무부서 등 특별히 설립된 기관과 조직에서 수많은 전문 인력을 활용하여 체계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국가가 이렇게 세금 징수를 위한 효율적인 제도를 갖추어 시행해 왔을까? 사실 인류가 공동체와 국가를 만들어 살아 온 아주 오래 전부터 세금은 존재했지만, 국세청 같이 세무를 전담하는 행정기관은 대개 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후에도 한참 지나서 설립되고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옛날에 세금을 걷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 민간 징세업자, 정부와 계약 맺고 세금 징수를 대신해
조세행정을 전담하는 정부 조직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조세 징수에 여러 가지 방식이 활용되었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한 가지 방법은 징세업자(tax farmer)에게 청부하는 것이었다. 민간 징세업자(이하 민간업자)들은 정부와 계약을 맺어 조세의 징수를 대리하였다. 역사 속 민간업자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히 징세를 일부 대리하는 개인이기도 했고, 다수의 납세자를 대상으로 거액의 세금 징수에 나서는 대형 조직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정부와는 수의계약을 맺기도 했으나, 대부분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공개입찰을 통해 민간업자를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종류의 세금에 대해 민간업자에 대한 조세징수 도급(都給)이 이루어졌고, 시대·지역·세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유명한 사람들이 징세업에 종사한 경우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오(Matthew),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등이 있다.
민간업자에게 조세 징수를 도급했던 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여러 도시국가의 원로원이 세금의 징수를 지역 상인들에게 위탁하도록 결정했다. 각 도시국가들은 자체 재원은 물론 바빌론(Babylon) 제국에 상납할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었다. 세금은 보통 징세업무를 위탁받은 상인들이 매년 초 계약시점에 정부에 선납하였고, 이후 징세를 대리하는 상인들은 납세자인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스스로의 수입으로 삼았다. 보통 선납금액보다 실제 징수액이 더 컸으므로 징세대리업이 성행할 수 있었고, 연초에 선납하는 금액은 징세권에 대한 일종의 권리금과 같았다.
이후에도 민간업자가 징세를 대리하는 경우는 빈번히 나타난다. 기원전 이집트 왕국에서도 징세업무의 민간 도급이 폭넓게 활용되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텔로나이(telonai), 로마 제국에서는 푸블리카누스(publicanus)라고 불리는 징세대리업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이후에도 조세징수 도급의 역사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오스만투르크 등에서 지속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이후로 종합 조세징수도급 체제인 페름 제네랄(fermes generales)이 성립했는데, 종합징수인 40인이 징세대리인 연합체를 만들고 국가와 수의계약을 통해 징세업무를 장악하였고,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 징세 위탁으로 거래비용 줄이고 불확실성에 대비
옛 정부가 징세업무를 민간에 위탁한 이유는 거래비용을 줄이고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된 지방행정 조직을 갖추기 쉽지 않았고, 화폐경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물 등으로 납부된 세금을 운송하는 데에는 막대한 거래비용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 직접 원거리 징세에 나서기보다는 현지 사정에 밝고 물류와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에게 맡길 때 징세에 수반되는 비용이 절감될 수 있었다.
한편 농산물 산출은 풍흉에 따라 변동이 커서 실제 세수 규모를 연초부터 정확히 예측하기는 늘 어려웠는데, 징세를 확정금액으로 선납 받으며 민간에 도급할 경우 정부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민간업자들은 현지 사정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바탕으로 실제 세수 규모를 보다 정확히 추정할 수 있었고, 장기 계약을 통해 위험을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징세업의 사업성을 키워 나갔다.
| 정부의 관리 부재 속에 발생한 징세대리는 저항을 불러와
민간을 통한 징세대리가 늘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 행정력의 공백 속에 작동했던 민간업자의 징세업무 수행은 종종 가혹한 징수로 이루어져 납세자들의 원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불확실성 속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법정세율보다 높게 세금을 거두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고, 정해진 세금을 제때 납부하지 못할 경우 고리대금으로 납세자를 몰아넣고 이자를 못 갚을 때에는 토지를 강탈하기도 했다. 민간업자의 폐해는 종종 민란과 폭동의 원인이 되었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징세의 민간위탁을 중단했던 적도 많았다. 프랑스의 종합징수체제의 경우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종합징수인 38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민간업자의 징세대리는 조세행정에 수반되는 거래비용이 크고, 조세수입의 불확실성이 컸던 시절에 유행했었다. 근대 이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전국적인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징세에 수반되는 거래비용이 감축되었다. 또한 토지조사·일기예보·농업기술의 발달은 조세수입 예측과정에서의 불확실성을 줄여주었다. 따라서 민간에 대한 징세업무의 위탁은 서서히 소멸하였고, 국세청 등 국가기관이 설립돼 세무행정을 전담하게 되었다.
토지세·관세·물품세의 비중이 줄어들고 새롭게 개발된 소득세·법인세·부가가치세의 활용이 늘며 세정을 전담하는 국가기구는 특화를 통해 더욱 발전하였다. 따라서 요즈음 세무행정은 대개 국가의 임무로 여겨지며 정부에서 직접 수행하고 있다.하지만 최근 정부의 업무를 일부 민간에 위탁하며 정부의 규모를 줄이자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징세업무의 일부를 민간업체에 위탁하는 방안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고 선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sungo@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