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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경제교육(종간)
신뢰는 경제발전에 기여하는가?
고 선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2014.09.30

역사 속에서 경제성장은 불균등하게 이루어져 왔다. 예전에 못살던 나라가 지금은 더 잘 살기도 하고, 예전에 영화를 누렸던 국가들이 이제는 최빈국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똑같이 못살던 나라들 중에도 근래에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여 잘 살게 된 경우도 있고, 경제성장에서 뒤처져 상대적인 소득수준이 과거와 별다를 바 없는 국가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경제성장 요인으로서의 사회적 자본: 신뢰

경제성장을 가져오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자본이나 노동과 같은 요소의 투입을 늘리면 경제는 성장한다. 또는 요소의 투입에 변화가 없더라도, 연구개발(R&D)이나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를 통해 기술수준이 향상되면 산출량은 증가할 수 있다. 이외에도 초·중등 공교육을 통해 전반적인 인적자본의 수준이 나아지면 경제가 더 빠르게 발전한다. 재산권을 보호하고 계약의 원활한 이행을 돕는 좋은 제도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문화적 요인, 특히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적 자본이란 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관계 속에 축적되어 온 다양한 관습·관행·규범·가치관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최근 여러 형태의 사회적 자본 중에서도 특히 신뢰(trust)가 주목받고 있다.

신뢰에는 가족이나 이웃, 동료 등 가까운 관계 속에서 지인 간에 맺어지는 특수화된 신뢰와, 한 사회 속의 불특정 다수에 대해 개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화된 신뢰가 있다. 이때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란 바로 일반화된 신뢰를 뜻한다.

경제학자들은 신뢰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우선 신뢰는 시장에서 거래비용을 감축시킨다. 거래 당사자 사이에 신뢰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다면 계약과 거래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 보험·중개인·사법체계 등 다양한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되고, 이때 상당한 거래비용이 발생한다. 하지만 신뢰수준이 높아지면 이 같은 장치들을 제거하거나 단순화시켜 거래비용을 줄이고, 거래가 촉진되며,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이외에도 신뢰는 금융시장 활성화, 생산성 제고, 투자 증가, 법·제도의 품질 등과 정(正)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알려졌다.


| 최근 세계가치조사 결과 우리나라 신뢰수준은 세계 16위

한 사회가 지닌 일반화된 신뢰의 수준은 어떻게 측정할까? 연구자들은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 같은 표본설문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각 국가와 지역의 신뢰지수를 산출한다. 임의로 추출한 조사대상자에게 “당신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같은 질문을 던진 뒤, “네, 보통 대부분의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응답한 이의 비율을 통해 한 사회의 신뢰지수를 계산한다.

2010~2012년 동안 조사된 제6차 세계가치조사의 결과를 살펴보면 국가별 신뢰지수는 상당히 큰 편차를 보여준다. 조사가 이루어진 전체 52개국 중 네덜란드의 신뢰지수가 66.2%로 가장 높았고, 스웨덴이 63.8%로 뒤를 이었다. 반면 최하위인 필리핀의 신뢰지수는 2.8%에 불과했고,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경우에도 3.2%에 머물렀다. 우리나라는 조사대상국 중 16번째로 신뢰지수가 높았지만, 지수값은 29.7%로 네덜란드나 스웨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 신뢰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요인은 다양해

그렇다면 한 국가의 신뢰수준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사실 국가별 신뢰지수의 값은 단기간에 별로 변동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일반화된 신뢰수준은 오랜 기간 동안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국가의 신뢰수준이 변화할 수 있다. 최근 경제학 연구문헌에 따르면 신뢰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도, 인위적인 사건에 따라 변동하기도 했다.

자연환경 중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기후변동성이 주로 지적된다. 역사 속에서 보통 농사 작황은 강수량·일조시간·기온 등 기후 요인에 따라 좌우되었다. 지역에 따라 기후 변동성이 큰 곳에서는 예기치 않게 흉작에 처할 가능성이 컸고, 따라서 사람들은 한 해의 작황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했다. 농산물 저장을 늘렸고, 저장한 농산물은 공동으로 관리했다. 농사 이외에 다른 지역과의 교역에도 더 활발히 나섰다.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협업이 촉진되었고, 사회적 신뢰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한편 신뢰수준은 인위적인 사건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을 들 수 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신대륙에는 유럽 등지로 수출하기 위해 면화·담배·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세워졌고, 노예 노동으로 운영되었다. 노예는 주로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무역을 통해 조달되었는데, 16세기부터 아프리카에서는 납치와 인신매매 등이 횡행하게 되었다. 노예의 수출은 해변에 위치한 주요 항구들을 통해 이루어졌고, 인신매매 등은 해변과 항구에 가까운 지역에서 더욱 활발히 일어났다. 반면 깊숙한 내륙 지역은 노예제와 인신매매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다. 흥미롭게도 현대 아프리카 국가들의 신뢰지수를 분석해보면 옛 노예 교역항이나 해변 지역에 가까울수록 신뢰수준이 낮고, 내륙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신뢰지수가 상승한다. 노예제와 인신매매가 가져온 사회적 신뢰의 붕괴가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로도 2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신뢰수준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증거는 다양하게 발견된다. 미국 이민자들의 신뢰수준에 대해 분석해보면 이민 1세대에서는 출신국의 신뢰수준과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2세대와 3세대로 넘어가면서 미국의 평균적인 수준으로 수렴한다. 동유럽 지역들의 신뢰수준을 살펴보면,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지역의 신뢰수준이 다른 지역보다 더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 관료들의 교육수준이 보다 높았고 부패가 낮았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신뢰가 오랜 역사 속에서 경험적으로 형성되기는 하지만, 당대의 정책과 노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교육은 신뢰의 형성과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는 어떤 방식의 교육을 받는가에 따라 개인의 신뢰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일방적인 강의보다 토론 등을 통한 수평적 교수법을 활용하고, 모둠학습을 통한 협업이 활발히 이루어진 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다른 학교 졸업생보다 이후에 신뢰수준이 더 높게 나타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일반화된 신뢰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전쟁과 식민지배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 속 경험이 아마도 현재의 신뢰수준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한 사회의 신뢰수준이 단기간에 쉽게 변화하지는 않지만,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신뢰수준의 제고를 위한 노력이 무용하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어떠한 방식으로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는가는 다음 세대의 사회적 신뢰수준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 있다고 경제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고 선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sungo@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