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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경제교육(종간)
이스털린의 역설, 행복을 위한 경제교육이란?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2014.09.30

“먹고 살 정도의 벌이, 잘나가진 못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직함, 교통 편리한 곳에 아담한 집 한 채. 그리고 편안하고 튼튼한 차(車).”

요새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다. 고3 철학 수업, 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인생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묻곤 한다. 중구난방으로 여러 답변들이 쏟아지지만, 대개 위에서 소개한 네 가지로 간추려진다.

언뜻 보면 소박하고 무난한 소망 같다. 하지만 한 학급 34명의 학생들 가운데 이 네 가지를 이룰 아이는 얼마나 될까? 20명? 30명?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이다. 그 정도 수준은 중산층만 되어도 무난히 다다를 듯싶다.

하지만 경제학자 이스털린(Richard A. Easterlin)은 고개를 젓는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위의 네 가지 소망을 이룰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왜 그럴까? 불황이어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워서?


|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남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기 때문

이스털린의 설명은 철학적이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다. 봉급이 150만 원에서 300만 원으로 올랐다. 뛸 듯이 기쁠 것이다. 그런데 자기 월급이 300만 원 올랐을 때 남들의 급여는 350만 원으로 인상되었다면 어떨까? 이때도 과연 기분이 좋을까?

위의 네 가지 조건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먹고 살 만한 벌이 수준’에는 절대치가 없다. 자신보다 잘 버는 이들이 있는 한, 마음 한 구석의 궁상스러운 느낌은 가시지 않을 터, ‘부끄럽지 않은 직함’, ‘아담한 집 한 채’, ‘편안하고 튼튼한 차’도 다르지 않다. 무엇을 얻게 되건 인간은 그 이상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모습을 가리켜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이라 부른다. 이는 살림살이가 나아져도 시민들의 행복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경제교육은 소득을 높이고 합리적으로 돈을 쓰게 하는 쪽으로 모아진다. 인류 전통의 지혜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은 동북아시아에서 널리 통하던 처세훈(處世訓)이다.

이 말들의 의미를 설명해 보자. 학교의 봉사활동을 예로 드는 게 좋겠다. 중증장애인 시설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보라. 봉사를 하러 갔던 아이들은 돌아올 때 큰 깨달음을 얻어 오곤 한다. 한나절 땀 흘리고 나면 생활 곳곳에서 터져 나오던 불평이 잠잠해진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문 막힌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는 까닭이다.

이스털린은 남과의 비교를 불행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행복해지는 비결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자신보다 나은 자들과 자기 처지를 견주지 말라. 자신보다 못한 위치의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 보라.


| 행복해지기 위해선 늘 돕고 베풀어야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산다. 그러나 세상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 지구상에는 위협에 떨며 모질게 하루하루 살아남아야 하는 곳들도 적지 않다. 신문은 매일같이 전쟁과 굶주림, 폭력과 재앙의 소식들도 가득하지 않던가. 이들에 비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행복해지는 더 좋은 방법은 늘 돕고 베푸는 데 있다. 테레사 수녀의 표정은 온유하고 밝았다. 수단의 성자(聖者) 이태석 신부의 얼굴은 또 어떤가. 베풂이 가득한 삶에는 불행이 깃들기 어렵다.

자신에게 찾아든 불행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에게 그 자체로 위안을 안긴다. 나아가 남을 돕는 일은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만큼 가슴 벅찬 일도 없다.

인류의 오래된 지혜는 영원(永遠)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서양인들은 오랫동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격언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돈이 엄청나게 많건,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건 상관없다. 죽음 앞에서는 부귀영화도 덧없다. 그러니 남과 비교하며 애면글면할 필요 없겠다.

나아가 역사에 우리네 삶을 견주어 보라.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파라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유라시아를 발 밑에 두었던 칭기즈칸의 제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과자를 빼앗긴 아이는 세상을 다 잃은 듯 서럽게 운다. 어른은 그렇지 않다. 삶 전체로 볼 때 과자 따위는 하찮고 소소한 문제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끝을 생각하고 역사와 흐름을 짚어가며 사는 이들은 자잘한 이권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흘 굶고 엄동설한에 벌벌 떠는 상황에서 행복하기는 어렵다. 반면 등 따시고 배부르다 해서 꼭 행복하리란 법은 없다. 헐벗고 굶주리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먹고 살 만한 처지에 이르렀다면 삶의 방향은 달라져야 한다.


| 물질에만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더 많이 갖고 더 풍부하게 누린다고 인생이 만족스러워지지는 않는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인격이 훌륭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류 역사는 비뚤어진 영혼으로 세상을 힘들게 한 폭군(暴君)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부와 높은 지위를 누렸었다.

어떤 문화에서든 ‘겸손’과 ‘청빈’은 존경받는 가치였다. 자본주의에서는 더 많은 소비와 돈 버는 능력이 미덕(美德)처럼 여겨진다. 학생들의 진로 희망은 경영학 같이 돈 되는 분야로 더욱 몰린다. 문학과 철학, 역사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을 전공하고 싶다는 젊은이들은 날로 줄어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과연 ‘먹고 살 정도의 벌이, 잘 나가진 못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직함, 교통 편리한 곳에 아담한 집 한 채, 편안하고 튼튼한 차’라는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가르침을 되새길 일이다.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