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20년 동안 두부를 만들어 중소기업을 일군 A업체는 2007년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CJ와 대상 등 덩치 큰 대기업이 두부시장에 진출하며 매출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두부산업은 1983년 중소기업 고유업종으로 지정돼 보호받았지만, 2006년 고유업종제도가 폐지되며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에 시장을 상당 부분 빼앗겼다. 거대한 자금력을 등에 업고 시장에 진출한 대기업들은 다양한 마케팅을 동원해 그동안 중소기업이 진출해 있던 시장을 빠르게 점령했다.

고추장 · 간장 · 된장과 막걸리 · 김치 · 떡 · 재생타이어 · 골판지 상자 · 세탁비누 · LED 조명시장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주로 중소기업들이 사업하는 ‘골목상권’이었지만, 이 시장에 대기업들이 속속 진출하자 중소기업의 경영여건이 악화됐다.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자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다. 대 · 중소기업의 상생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민간자율기구 동반성장위원회는 2011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 분담을 통해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며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선정하겠다고 나섰다. 두부사업과 같이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장에는 대기업 진입을 규제해 중소기업을 보호 ·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당시 동반위는 “중소기업이 충분히 사업할 수 있는 영역에까지 대기업이 진출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심해지고 사회 혼란이 커질 것”이라며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배경을 설명했다.
| 동반위, 101개 품목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동반위는 2011년부터 올해까지 일반제조업과 서비스업 분야에서 총 101개 품목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하고 대기업에 진입자제 · 확장자제 · 사업축소 · 사업이양 등을 권고했다. 적합업종 지정에 따른 대기업 진출 규제는 권고사항으로 의무는 아니다.
물론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논란은 얼마만큼의 시장을 중소기업 영역으로 지정해 보호할 것인가였다. 매출액이나 시장규모 등 일률적인 기준으로 적합업종을 선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규제가 될 수 있다. 대기업 활동을 규제할 경우 소비자 만족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적합업종 지정에 쟁점이 됐다. 중소기업 영역을 지정해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대기업의 경쟁력이 소비자에 더 큰 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기업 진출이 막힐 경우 대기업과 거래하는 협력업체의 일감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동반위는 시장규모가 너무 크거나 작지 않고, 일정 수 이상의 중소기업이 사업하는 품목 중 상시근로자 기준으로 봤을 때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생산하는 게 더 효율적인 품목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선정했다. 다만 제품을 생산하는 데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거나 안전 · 위생을 위해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든지 대기업의 진출을 규제할 경우 소비자만족이 크게 떨어지는 품목은 제외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시장에서 대기업이 동반위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동반위는 중소기업청에 사업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사업조정이란 대기업 진출로 다수의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 대응력이 약한 중소기업에 시간적 여유를 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정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율 합의를 중재하는 제도다. 적합업종 지정 기본기간은 3년이고 적합업종 지정 이후 한 차례 재지정할 수 있어 최대 6년 동안 적합업종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 적합업종 놓고 계속되는 갈등… ‘中企 보호 vs 경쟁력 약화’
그러나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대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기업 간 경쟁이 세계무대에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사전에 사업영역을 규제하는 것은 과도한 보호로 오히려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기업 진입을 규제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에 가지 않고 외국계 기업만 반사이익을 누린다는 우려도 있다. 호랑이(대기업) 없는 굴에서 여우(외국계 기업)가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인데 대기업에 대한 사업축소 권고가 내려진 재생타이어 시장에서 세계 1, 2위 업체 브리지스톤과 미쉐린이 빠르게 시장점유율을 늘리고 있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논란이 이어지며 최근 중소기업계에서도 무조건 중소기업 영역을 보호하기보다 중소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성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법제화보다는 대 · 중소기업의 자율 합의에 따라 적합업종 제도가 운용돼야 한다.”라고 했다. 안충영 동반위원장 역시 “적합업종을 법제화하는 것은 억지로 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규제하겠다는 것”이라며 “적합업종을 지정하기에 앞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충분한 대화를 해서 자율적으로 협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선옥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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