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에서는 국가 자산으로서의 문화재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1~4월까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을 다룬다.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 속 우리 선조의 경제생활을 배우는 자료로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1월 - 조선왕조실록 2월 - 승정원일기 3월 - 일성록 4월 - 의궤
* 각 월호에 실리는 내용의 순서는 필자의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UNESCO는 인류 문화의 계승에 있어 중요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훼손되거나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는 기록물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1992년에 세계 각국의 주요 기록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효과적인 보존 수단을 강구해 나가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사업을 창설하였다. 사업을 주관하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1995년에 세계기록유산의 등재 기준을 확정하였고, 1997년부터 2년마다 한 번씩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하고 있다. 1997년의 첫 번째 선정에서 우리나라는 두 건의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다.

500여 년의 우리 역사가 담긴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제1대 왕 태조(太祖)부터 제25대 왕 철종(哲宗)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으로 정리한 조선의 공식 국가기록물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정족산사고본(鼎足山史庫本)을 기준으로 1,187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 등의 국정운영 내용은 물론 예술과 종교,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한 왕대의 실록은 그 왕이 서거한 후 다음 왕대에 만들어졌다. 실록 편찬을 주관하는 임시 기관인 실록청(實錄廳)이 만들어지고 실록 편찬에 필요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실록 편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이다.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원인 사관은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수행하면서 왕과 신하들의 언행과 국정 운영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초(史草)이다. 사관의 사초는 왕도 볼 수 없도록 엄격히 규제했는데, 이는 사관들이 권력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공정하고 정직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초에는 사관들이 국정 운영의 잘잘못을 날카롭게 평가하고 비판한 사론(史論)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관들은 고위 대신들은 물론 국왕이라 하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으므로, 만약 사론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 정치적 파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사초 중에서 사론 내용은 시정기에 포함하지 않고 사관이 따로 보관하다가 실록청에서 자료를 수집할 때 제출하게 했는데,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고 한다. 그리고 사초 내용 중 사론을 제외한 객관적 사실들은 각 관청의 업무 보고 내용과 함께 종합·정리되어 책으로 편집됐는데, 이것이 시정기이다.
사초와 시정기 및 기타 자료들을 참고하여 작성된 실록 원고는 몇 차례의 보안·교정을 거쳐 최종 완성되었다. 완성된 실록은 사초와 마찬가지로 왕을 포함한 누구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실록이 공정하게 집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개국 초 태조부터 태종까지 세 왕의 실록은 필사본으로 작성되었다가 「세종실록」부터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간행하였다. 실록은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국가기록물이었기 때문에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금속활자로 간행했던 것이다.
실록 보존을 위한 노력: 분산보관과 방습처리
실록은 조선전기에는 4부,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5부가 제작되었으며,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사고(史庫)에 봉안하여 관리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春秋館)과 지방의 충주·성주·전주 등 모두 4곳의 사고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과정에서 성주·충주와 춘추관 사고가 왜군에 의해 파괴되면서 그 안에 보관하던 실록 역시 소실(燒失)되었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 전주 지역 유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정부는 정쟁으로 재정이 피폐된 상황에서도 실록 복간(復刊) 사업을 최우선으로 추진하였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실록마저 불의의 사고를 당할 경우 조선전기 200년의 역사가 완전히 사라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부의 실록을 추가 제작하여 모두 5부의 실록을 갖추게 된 조선정부는 이를 5곳의 사고에 분산 보관하였다. 특히 서울의 춘추관을 제외한 지방 사고들을 강화(江華)와 강릉 오대산, 영변 묘향산, 봉화 태백산 등지에 설치하여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재발을 막고자 했다. 이후 묘향산사고는 후금(後金)의 침입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남쪽의 무주 적상산으로 옮겼고 강화사고도 효종대에 강화도 내의 정족산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서울의 춘추관 사고는 반란과 궁궐 화재 등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지방사고의 실록들은 조선말까지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험준한 산 중에 사고를 설치했던 선조들의 혜안 덕분에 실록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사고에서 실록은 실록궤(實錄櫃)에 넣어서 보관했는데, 궤 안에 천궁(川芎)·창포(菖蒲) 가루와 같은 방습제(防濕劑)를 넣어서 실록이 습기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또 조선정부는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사관을 사고에 파견하여 실록을 꺼내서 그늘에 말리는 포쇄(曝?)를 실시했는데, 이 역시 방습을 위한 조치였다. 실록이 제작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최근에 만든 것처럼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 실록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일제에 의해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지진의 피해를 면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27책은 1932년에 국내로 돌아왔고, 나머지 47책은 2006년에 환수되었다. 한편,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북한으로 옮겨졌으며,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겨진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 실록은 여러 창고들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실록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고, 이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의 하나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