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칼럼에서는 국가 자산으로서의 문화재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1~4월까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을 다룬다.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 속 우리 선조의 경제생활을 배우는 자료로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1월 - 조선왕조실록 2월 - 승정원일기 3월 - 일성록 4월 - 의궤
* 각 월호에 실리는 내용의 순서는 필자의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중략) 대동법(大同法)은 충청도에서 시행하여 이미 효과를 보았습니다. 대동법이 백성에게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전라도에서 시행할 때 평야 지역만 먼저 실시하고 산지의 고을들은 내년에 실시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략)”
위 글은 1658년(효종 9) 9월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전라도 관찰사 서필원이 올린 상소 중 일부로, 서필원은 전라도 전 지역에서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대동법’은 조선시대 세금의 하나인 공납(貢納)을 지방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하여, 조선후기 조세 및 재정 운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제도이다.
전라도 지역의 대동법 실시 방안을 구체적으로 기록
『승정원일기』에는 서필원이 상소를 통해 제시한 전라도 지역의 대동법 실시 방안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변사(備邊司)에서 서필원이 제시한 방안의 타당성 여부를 논의하여 효종에게 보고한 내용까지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효종 재위 시기(1649~1659년) 대동법이 전라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가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구인 승정원(承政院)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들과 국왕의 명령,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등을 날짜별로 기록해 놓은 일기체 형식의 기록물이다. 원래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작성됐지만, 현재 조선전기의 일기는 남아있지 않고 1623년(인조 10)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작성자 실명화 원칙으로 사명감과 책임감 부여
승정원은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왕명(王命)의 출납(出納), 조보(朝報) 발행, 국왕의 국정 운영 보좌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국왕에게 올리는 모든 문서들은 승정원을 거쳐서 보고되었고 국왕의 명령이나 재가도 반드시 승정원을 통해 담당부서에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승정원은 국왕의 말을 전달하는 ‘목구멍과 혀’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후설(喉舌)’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승정원의 관원은 승지(承旨)와 주서(注書)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주서가 『승정원일기』의 작성을 담당하였다. 주서들은 매일 국왕을 수행하면서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을 속기록으로 정리했으며, 여기에 승정원에 올라온 각종 보고서의 내용들을 추가하여 일기를 작성하였다. 주서는 속기록을 작성해야 했으므로 반드시 문장 능력이 탁월하면서도 글을 빨리 쓸 수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주서가 작성한 일기는 보통 한달 분량이 한 책으로 묶여서 승지에게 보고되었고, 승지는 일기 내용을 검토한 다음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최종적인 재가를 받았다. 또, 국왕의 재가를 받기 전까지는 일기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일기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승정원에 근무하면서 그날의 일기 작성을 담당했던 승지와 주서의 실명(實名)이 반드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실명화(實名化) 원칙은 일기 작성자들에게 정확하고 공정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當代)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즉, 『조선왕조실록』이 해당 국왕의 서거 후 다음 왕대에 편찬되었던 것에 비해, 이 책은 바로 그 당시에 매일매일 작성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서는 승정원에서 취급한 모든 자료들을 빠짐없이 망라해서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승정원으로 올라온 상소나 각종 보고서는 전문(全文)을 모두 수록했으며, 국정 논의 내용도 주서의 속기록을 바탕으로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는『조선왕조실록』에서 각종 보고서나 국정 논의의 핵심적인 내용들만 요약·정리하여 수록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1차 자료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하였기 때문에 국왕의 일거수일투족, 건강 및 심리상태, 시간대별 이동 사항 등 국왕의 일상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일기의 시작 부분에 매일의 날씨를 기록한 점도 주목된다. 청(晴: 맑음), 음(陰: 흐림), 우(雨: 비), 설(雪: 눈) 등으로 매일의 날씨가 기록되어 있다. 날씨기록만 모아도 조선후기 288년간의 일기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처럼 매일의 기후 상황이 장기간 기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국정 운영 과정에서 판례 역할 담당
한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복잡한 정치·사회적 현안이 제기되거나 국가·왕실의 중요한 의례(儀禮)를 시행할 때, 전례(前例)를 참고하기 위해 『승정원일기』를 이용한 사례들이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조선시대에 국정 운영 과정에서 오늘날의 판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도 다른 기록문화재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조선전기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함락될 당시 소실되었고, 조선후기에도 크고 작은 화재와 사고 등으로 인해 일부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춘방일기(春坊日記)』, 『조보(朝報)』 등 다양한 기록들을 참고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였다.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진행된 개수(改修) 작업의 결과 조선후기 288년간의 『승정원일기』가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철저하고 정확한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기록정신이야말로 세계적으로 가장 방대한 역사기록물이 탄생하게 된 근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