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을 받고 교단에 섰을 당시 나는 생각했다. 지금껏 교사가 되기 위해 쌓아 온 지식을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치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좋은 학생들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기대는 학생들의 신임 교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학기 초의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첫 수업. 경직되어 있던 아이들에게 편히 다가가고자 들려주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내 수업을 마음 편히 노는 시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엄격하게 수업만 진행하는 다른 선배교사들의 수업과 차별화하여, 웃음으로, 인격적으로 다가가면 언젠가는 진심으로 내 마음을 알고 변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한두 달이 지나고 여름방학이 다가와도 수업은 더 힘들어지기만 했고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렇게 2학기를 맞이할 수 없었던 나는 힘든 여름방학을 보내며 뭐가 잘못됐는지 되짚어보고 선배 교사들에게 조언도 구하며 나름의 세 가지 원칙을 정할 수 있었다.
첫째, 일관성을 가지고 원리 원칙에 충실하자.
둘째, 차별 없이 대하자.
셋째, 변화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자.
2학기가 시작되고 달라진 나의 태도에 학생들의 저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이 있으면 언제나 외출증을 써주던 OK맨이 외출 후엔 외출 내용에 대한 설명을, 아프다고 하면 보건 선생님의 소견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평을 하는 것은 약과이고 반항적인 태도로 대드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에게도 원칙 아래 차별 없이 대하면서 아직 성장하고 있는 그들이 변화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후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원칙들은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
얼마 전 예전에 졸업한 제자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시절 집을 나가신 후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른들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 초·중학교 내내 교사와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때 이미 한 번의 유급으로 또래보다 나이도 한 살이 많았다. 준수하게 잘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모든 행동이 삐딱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군림하려 해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 떠드는 것은 다반사이고 지적을 하면 곧바로 대드는 통에 크고 작은 징계를 받아왔던 차였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들이 많아지고 며칠만 결석하면 또 유급을 해야 하는 상태였다. 아직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회에 적대감을 가지고 이해해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 아이를 찾아가 같이 등교를 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나무라고 징계를 받을 일이 있으면 받도록 했다. 다행히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인근 고등학교에 입학도 했다.
바로 그 아이가 나에게 대학을 갔다며 전화를 한 것이었다. 지방 대학이었지만 제법 건실한 4년제 대학의 사회체육과였다. 공부도 열심히 해 장학금도 받았다고 했다. 그 아이가 전화를 끊을 무렵 나에게 말했다. 졸업을 시켜주셔서 고맙다고. 나도 이야기했다. 나의 원칙에대한 믿음을 깨지 않아서 많이 고맙다고.
교육은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좀 더 먼저 태어난 이가 할 수 있지만 기르는 일은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있어 학생에 대한 애정은 원칙과 믿음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원칙과 누구나 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교사를 한 날보다 해야 할 날들이 더 많이 남아있지만, 앞으로도 기르는 마음으로 가르치는 그런 교사로 살아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