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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산과 경제: 국왕의 일기 일성록, 조선 후기 경제· 사회상 고루 담아
강문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2015.03.09

 


증자(曾子)가 말하였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

 

유교 경전의 하나인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내용이다. 자신을 반성하는 방법의 하나로 일기 쓰기가 있다. 실제 조선시대 학자들 중에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점검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학자의 일기만이 아니라 국왕의 일기도 있었다. 일성록이 바로 그것이다.

 

국왕 개인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일기로



일성록은 조선 후기 국정의 제반 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일기체의 연대기이다. 1760(영조 36)에서 1910(순종 4)까지 151년 동안의 일기 2,329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9731231일에 국보 제153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일성록의 모태는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위에서 본 논어의 구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자신의 학문과 행실을 반성하기 위해 일기를 썼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존현각일기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계속 일기를 작성했지만, 국왕이 처결해야 할 국정 업무가 많아지면서 일기를 직접 쓰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1783(정조 7)부터 일기 작성 방식을 바꾸어, 규장각 검서관(檢書官)과 각신(閣臣)들이 국정 자료들을 참고하여 일기 초본을 작성하면, 이를 5일에 한 번씩 보고받아 검토한 후 재가함으로써 일기를 완성하였다. 한편, 정조는 1785(정조 9)경에 규장각에 지시하여 당시까지 작성된 일기 및 각종 기록들을 종합·정리하여 일목요연한 체제를 갖춘 일기로 재편집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때 일기 제목을 앞서 보았던 논어의 구절을 인용하여 일성록(日省錄)’으로 정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일성록은 정조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일기로 전환되었다.

 

일성록은 규장각에서 작성한 이후에도 국왕의 재가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국왕의 일기라는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일성록에서 국왕을 1인칭의 [()]’로 표시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조):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뒤에 어전(漁箭)이 전에 비하여 숫자가 줄었는가? 

정민시: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는 300여 곳이었으나 지금은 30여 곳으로 줄었습니다. 균역법 시행 전에는 관청과 백성이 함께 어전을 설치해서 고기를 잡으면 관청과 백성이 나누어 썼고, 잡지 못했을 때도 세금을 거두지는 않았으므로 백성이 모두 그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고기를 잡거나 못 잡거나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세금을 거두기 때문에 백성이 어전을 설치하지 않습니다.

 

위 글은 17771213일에 정조와 정민시(鄭民始)가 균역법의 폐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균역법은 1750(영조 26)년부터 실시된 조세제도로, 군포(軍布)2필에서 1필로 줄여 백성들의 군역(軍役)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어업세·염세·선박세 등을 징수해서 부족한 세수(稅收)를 충당하였다. 위 대화에서 정민시는 균역법으로 인한 세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부과한 어전세, 즉 고기잡이에 대한 세금이 어전 설치 급감의 원인임을 지적하였다. 이 글을 보면 정조가 1인칭의 로 기록되어 있어서 다른 국가기록물에서 국왕을 3인칭의 ()’으로 기록한 것과 구분된다. 이는 일성록작성의 주체가 국왕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물가·조세에 관한 전례도 쉽게 찾을 수 있어

 

일성록은 정조가 자신의 학문과 정치를 반성하기 위해 작성한 일기에서 출발하여 국정일기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연대기들에 비해서 당대(當代)의 국정 운영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성이 강하였다. 이러한 목적성은 일성록의 서술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 일성록은 기사의 모든 내용을 망라하기보다는 국정에 참고가 될 만한 핵심 내용들을 선별하여 요약·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 필요한 기사를 찾기 쉽도록 강목체(綱目體)’의 형식이 적용되었다. , 모든 기사들을 강(: 표제)과 목(: 세부 내용)으로 나누어 정리했으며, ‘부분을 부분보다 한 글자 높게 기록하여 눈에 잘 띄도록 하였다. 따라서 일성록을 참고할 때 먼저 만 읽으면서 기본 내용을 확인하다가 필요한 기사를 발견하면 그 기사의 을 읽으면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강계(江界)의 인삼 값과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 호조판서 채제공(蔡濟恭)이 아뢰었다. “(전략) 강계의 인삼 값이 치솟아 한 돈 값이 10여 냥으로 올랐는데, 조정에서 확정하여 지급한 값은 4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강계 지역의 백성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전에는 2만여 호나 되던 것이 지금은 7천 호로 줄었다고 합니다(하략).”

 

위 글은 일성록177634일자 기사로, 강계지역의 인삼 가격과 환곡에 관한 국왕과 관료들의 논의를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먼저 에서 해당 기사의 요점을 간략히 제시한 다음, ‘에서 구체적인 논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물가나 조세에 관한 전례가 필요한 경우 만 읽어도 위 기사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일성록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못지않은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 국왕들이 궁궐 밖에 나가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 조치를 내린 내용을 기록한 상언(上言격쟁(擊錚) 기사나 암행어사들이 지방 사회의 현실을 국왕에게 보고한 서계(書啓별단(別單) 기사 등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보다 훨씬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조선 후기 사회의 실상과 민()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 고종·순종대의 일성록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높다. 고종실록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주관 아래 편찬되었기 때문에 왜곡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 같은 시기의 승정원일기는 화재 등으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이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일성록에 의존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종·순종대() 일성록의 사료적 가치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