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지난 1월 26일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을 ‘BBB-’에서 투자 부적격 등급인 ‘BB+’로 한 단계 낮췄다.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이 투기등급인 ‘정크’로 강등된 것은 10년 만의 일이다. 러시아는 요즘 외국자본이 빠져나가고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1998년처럼 경제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왜 이처럼 러시아가 궁지에 몰린 것일까?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 국가들의 경제제재도 한 이유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국제유가가 크게 떨어진 탓이다. 러시아 경제는 원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인데, 유가가 급락하니 수입이 줄어들어 외국과의 교역에 필요한 달러와 나라살림에 쓸 돈이 궁해진 것이다.
요즘 국제유가는 바닥을 모를 만큼 하락 추세다. 1월 하순 현재 중동의 두바이유,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북해산 브렌트유 등 3대 유종(油種) 모두 배럴당 40달러선으로 2014년 6월(115달러)의 3분의 1 정도에 그친다. 사상 최고치였던 2008년 여름 배럴당 145달러(WTI 기준)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떨어진 것이다.

유가 하락은 채굴비용·원유수요 감소, 달러화 강세에 기인
왜 유가가 떨어지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원유 공급이 늘었다. 원유 시추 기술이 발달하면서 퇴적암(셰일, shale)층에 매장돼 있는 원유, 일명 셰일 원유를 채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크게 줄었다. 이에 미국·캐나다 등지에서 셰일 원유 생산이 급증했다. 작년 3분기 미국의 총 원유 생산량은 4년 전 같은 기간보다 46% 늘어난 하루 1,400만 배럴에 달했다.
유가가 떨어지면 석유수출국들의 모임인 OPEC(석유수출국기구)은 원유 생산을 줄이는 방식으로 하락을 저지했었다. 그런데 OPEC의 맹주국으로 하루 3,000만 배럴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해 11월 “감산(減産)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국제유가가 더 하락하면 미국의 많은 셰일 원유 생산업체들이 무너질 것이고 그러면 가격이 다시 오를 것이란 전략이 깔려 있다. 일종의 ‘치킨 게임’이다(OPEC의 원유 생산비용은 배럴당 평균 35달러 수준인 반면 미국의 셰일 원유 생산비는 67달러 수준으로 조사되고 있음).
둘째, 원유 수요는 주춤하는 추세다. 거대 인구를 가진 중국은 ‘원자재의 블랙홀’로 불린다. 원유·철광석·구리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은 중국 경제의 움직임에 좌우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예전보다 크게 떨어지면서 원자재 수요 또한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 중국의 원유 소비는 세계 전체 소비(하루 7,700~7,900만 배럴)의 11%에 달한다. 게다가 유럽·일본 등도 경기가 부진하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과 중국의 원유 소비는 2~3% 줄어든 상태다.
마지막으로 달러화 강세다. 국제 원자재 가격은 세계 상거래의 중심통화(기축통화)인 달러화로 표시(거래)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달러화 가치가 올라가면 원자재 가격은 약세,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면 원자재 가격은 강세를 띤다. 최근 달러화 가치는 미국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중앙은행(Fed)이 돈풀기 정책(양적완화)도 끝내면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일각에선 ‘슈퍼 달러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는 평가도 들린다.
원유수입국은 물가안정·소비증가, 원유수출국은 나라살림에 타격
국제유가 급락은 세계경제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유가가 떨어지면 원유를 써서 생산하는 제품의 생산비가 낮아진다. 그러면 제품 가격이 하락하고 물가가 안정되면서 소비가 늘어난다. IMF(국제통화기금)는 유가 하락으로 올해 세계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기존 전망 대비 0.3~0.7%포인트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옥스포드 이코노믹스(Oxford Economics)는 유가가 배럴당 20달러 하락하면 세계 성장률은 2~3년 내 0.4%포인트 가량 높아질 것으로추정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원유를 전량 수입해 쓰는 나라는 혜택이 클 수 있다. 우리나라의 원유 수입액은 연간 950억 달러(2014년 기준)에 이른다.
하지만 유가 급락으로 직격탄을 맞는 나라도 있다.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경제에서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GDP의 25%, 수출의 67%를 원유가 차지한다. 러시아 정부는 수입(收入)의 약 절반을 원유 수출에 의존한다. 국제유가가 떨어지면 나라살림에 필요한 돈을 얻을 데가 없게 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나이지리아 등도 예외가 아니다.
러시아 경제위기는 ‘자원부국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 경제가 원유와 가스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키우는 데 등한했다는 얘기다. 네덜란드 경제가 한때 원유 수출로 흥청망청하다 위기를 맞았던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과 유사하다.
산유국들의 경제가 휘청하면 일부 국가들이 경제위기를 맞을 수 있고 이렇게 되면 또 다른 글로벌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산유국의 공사 발주 감소, 원유 관련 선박과 장비시장 침체 등으로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 국제유가 급락은 어려움에 빠진 원유수출국들에게 산업경쟁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치킨 게임(chicken game)
경쟁자가 망하거나 포기할 때까지 생산 확대나 가격 인하를 지속하는 극단적 게임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