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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지금보다 행복했을까?』전영수 지음
우리는 불행한 시대를 산다. 한숨과 짜증이 반복된다. 일부를 빼면 예외는 없다. 오늘은 버텨내도 내일은 모르겠다. 괴롭고 힘들며 아프다. ‘절망을 끊고 희망을 찾자’고 외치지만 답 없는 메아리일 따름이다. 과연 원인이 뭘까. 고단한 호구지책(糊口之策) 탓이다. 고용불안, 요컨대 일이 문제다. 삶은 ‘밥’이고, 생존은 ‘소득’인데 일이 흔들리니 모두가 절망한다. ‘실업불안증→고용불치병’의 우려다. 서둘러 치료하고 예방할 때다. 결국 ‘절망→희망’의 치환은 간단하다. 안정적인 밥벌이의 확보다. 탄탄한 일자리가 희망의 불씨다.
돌이켜보면 불행은 나날이 점증됐다. 다시 말해 예전엔 불행이 덜했다. 하루하루 고된 건 맞지만 지금처럼 집단절망에 빠지진 않았다. 열심히 일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경험이 살아갈 맛을 줬다. 배고팠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믿고 땀방울을 흘렸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국부(國富) 총량은 훨씬 늘었지만 집단불행·상호갈등은 한층 깊어졌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이러한 문제제기에 책은 과거에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고용안정 덕분이었다고 답한다.
과거의 일자리는 지금보다 안정된 수준이었다. 임금은 낮아도 매년 늘어날 뿐 아니라 웬만하면 정년까지 한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장기·안정적인 고용확보다. 한국적 종신고용·연공서열로 설명된다. 고용안정은 경제성장 덕분이다. 회사가 매년 커지니 직원을 더 뽑고 또 끝까지 데려갈 수 있었다. 성장환경에 맞춰진 고용모델은 톱니바퀴처럼 정합성을 지닌 임금모델과 가족모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가령 표준가족인 4인 가구라면 남성전업·여성가사의 역할분담만으로 충분히 가계경제를 꾸려낼 수 있었다. 주거비·교육비·의료비·노후비 등이 고용안정으로 해결됐다.
지금은 달라졌다. 고용불안은 대한민국의 만성질환이 됐다. ‘정규직→비정규직’의 하향평준화로 양질고용이 줄었다. 청년은 사회진입부터 일회성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이는 사회구조마저 뒤흔든다. ‘고용불안→결혼포기→출산감소→인구감소→시장축소→매출감소→실업증대→재정악화’의 악순환 심화다. 해결책은 없을까. 고용카드는 결국 기업소관이다. 채찍과 당근 카드를 쥔 정부가 달래고 어르지만 결정권은 기업에 있다. 요컨대 기업이 바뀌면 된다. 물론 기업논리도 설득적이다. ‘사업부진→고용절감→생존유지’다. ‘고용=비용’의 등식 고수다. 허물기 힘든 거대장벽이다.
장벽을 허물자면 기업설득이 필수다. 기업에게 수익은 절대적이다. 공생의 대의명분도 자사의 수익창출보다 후순위다. 즉 ‘고용안정=수익확보’만 검증되면 기업은 움직인다. 책은 여기에 주목해 고용안정이 성과효율을 높인 사례를 찾았다. 노사상생이 지속성장을 낸, 직원만족의 힘이다. 주주 우선보다 직원 우선으로 ‘1+1=3’을 만들어낸 ‘직원행복→명품기업’의 샘플이다. 이를 총칭해 ‘직원존중의 기업복지’라 한다. 책은 일본기업 20곳을 분석해 기업복지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기업복지가 우리에게 왜 즉각적이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인지 힌트를 알려주는 것이다.
미국도 직원존중 경영철학을 주목한다. 직원존중 후 실적·평판의 개선증언이 늘어나서다. 내적 관심·동기가 외적 보상·처벌보다 더 결정적인 까닭이다. 채찍보다 중요한 게 당근이란 뜻이다. 많은 일본기업이 여전히 직원존중에 열심인 것도 그렇다. “돈은 떠나도 사람은 남는다”(마츠시타 고노스케)를 비롯해 인간존중의 혼다이즘(혼다 쇼이치로), 금권적 자본주의보다 자애적 자본(慈本)주의(이나모리 카즈오)가 금융위기 이후 재차 강조되는 기본맥락이다. 직원·가족이 우는데 기업·사회가 웃을 수는 없다. 배부른 기업과 배고픈 직원도 공존할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