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이후 일련의 제도 개혁을 통해 지방통치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여 전국의 모든 군현(郡縣)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는 주현(主縣)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그 외의 속현(屬縣)은 그 지역의 향리(鄕吏)에게 행정을 맡겼던 고려와는 대조되는 모습으로, 조선에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됐음을 의미한다.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원활한 지방 행정 운영을 위해서는 지역의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찍부터 전국 군현의 자연지리 및 인문지리 정보를 수록한 지리지(地理志) 편찬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 최종 결과물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15세기 지리지 편찬의 집대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의 지리지 편찬이 본격화된 것은 세종대(代)부터이다. 중앙 정부가 정한 편찬 지침에 따라 각 도별로 지리지를 작성하여 올리면 중앙에서 이를 종합·정리하여 전국 지리지를 편찬했는데, 그 결과물이 1432년(세종 14)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다. 이 지리지는 후에 『세종실록』의 부록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에 통상 ‘세종실록지리지’라고 불리지만, 원래는 『세종실록』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독립지리지였다.『세종실록지리지』는 행정·경제·군사에 관한 내용의 비중이 매우 높은데, 이는 효과적인 지방 통치를 위한 지역 현실의 파악에 역점을 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477년(성종 8)에는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이후 40여 년 동안의 변화상을 정리·보완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가 편찬됐다. 이 지리지는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이를 편찬하기 위한 자료집에 해당하는 『경상도 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가 전하고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비교해 보면, 호구(戶口)·전결(田結)·군정(軍丁) 등 경제 관련 항목이 빠진 반면, 명현(名賢)·정표문려(旌表門閭)·능묘(陵墓)·누대(樓臺)·제영(題詠) 등 문화·예속(禮俗)에 관한 항목이 크게 증가하였다. 호구·전결·군정 등이 빠진 것은, 정기적인 호구·토지 조사의 결과를 정리한 호적대장과 토지대장이 별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굳이 이 정보를 지리지에 수록할 필요가 없어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으로 이어졌다.
『팔도지리지』가 완성된 지 4년 후인 1481년(성종 12)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은 기본적으로 앞서 편찬된 『팔도지리지』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의 시문(詩文)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동국여지승람』은1486년(성종 17)과 1499년(연산군 5) 등 2차례 개정 작업을 통해 새 항목들이 추가되었고 기존 항목의 내용들도 수정·보완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개정이 다시 추진된 것은 30여 년이 지난 1530년이다. 1499년 개정 이후 변화된 내용들을 정리해서 기존 『동국여지승람』에 반영했는데, 새로 추가된 부분들은 새로 증보했다는 뜻으로 ‘신증(新增)’이라고 써서 구분했다. 이에 따라 개정된 지리지의 이름도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명명하였다. 이로써 세종대부터 본격 추진된 전국 지리지의 편찬은 100여 년 만에 최종 완성되었다.

지도와 지리지가 결합된 ‘종합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는 『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이름의 전국 지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의 시작 부분에도 도별 지도가 수록되었다. 이 점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도와 지리지가 결합된 종합지리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팔도총도』를 비롯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도들은 목판에 새겨져 인쇄됐으며, 지리지와 별개로 지도 부분만 따로 인쇄되어 보급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국을 경도(京都)·한성부(漢城府)·개성부(開城府), 그리고 8도(道)로 나눈 다음, 각 부와 도에 속하는 329개 지역의 각종 정보들을 항목별로 상세히 정리하였다. 항목들은 군현별로 약간 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25~30개 정도인데, 내용에 따라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행정과 관련된 항목으로는 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관원(官員)·성씨(姓氏)·풍속(風俗)등이 있다. ‘건치연혁’은 해당 군현이 처음 설치되어 당시까지 이어져 온 역사를 서술한 것이고, ‘군명’은 군현의 명칭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성씨’에는 그 지역이 본관인 성씨들이 수록되어 있다.
자연환경을 서술한 항목으로는 형승(形勝)·산천(山川)·토산(土産) 등이 있다. ‘형승’은 군현의 전반적인 지형(地形)을 서술한 것이며, ‘토산’은 지역의 특산물을 정리한 것으로 지역 경제와도 관련이 있는 항목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경상도 풍기의 인삼, 상주의 감, 영덕의 자해(紫蟹: 대게), 전라도 담양의 대나무, 영광의 조기, 제주의 귤 등 현재도 각 지역의 특산물로 유명한 물품들이 ‘토산’에 수록되어 있다.
군사 관련 항목에는 성곽(城郭)·관방(關防)·봉수(烽燧) 등이 있으며, 지역의 주요 시설물이나 유적지를 정리한 항목으로는 궁실(宮室)·누정(樓亭)·학교(學校)·역원(驛院)·교량(橋梁)·사묘(祀廟)·불우(佛宇)·능묘(陵墓)·고적(古蹟) 등이 있다. ‘관방’은 주요방어시설이고, ‘사묘’는 국가 주관의 제사를 시행하는 곳이며, ‘불우’는 사찰이다.
다음으로 지역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항목으로 명환(名宦)·인물(人物)·효자(孝子)·열녀(烈女) 등이 있다. ‘명환’은 해당 지역 지방관 역임자 중 주요 인사들을, ‘인물’은 그 지역 출신의 주요 인물들을 정리한 것이다. 또, ‘효자’·‘열녀’ 등의 항목에는 성리학적 이념과 윤리를 잘 실천한 인물들을 밝히고 널리 전파함으로써 지역 사회와 백성들을 성리학적 이념으로 교화하고자 했던 조선 정부의 목적이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이전 단계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와 가장 뚜렷하게 차이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영(題詠)’ 항목에는 지역과 관련된 주요 시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문예(文藝)를 중시했던 당시의 경향이 투영된 것이다.
이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00년 전 조선사회의 실상을 상세하게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적 규범과 문화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당시의 이념적 지향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