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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산과 경제: 조선 초기 지식인들의 고려시대 인식,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강문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2015.07.02

 

전통시대에 한 왕조가 명맥을 다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반드시 추진되었던 국가적 사업이 있었다. 바로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로부터 청대에 편찬된 명사(明史)까지 각 왕조마다 이전 국가의 역사를 정리한 정사(正史)를 편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에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15세기 전반 내내 고려의 역사를 편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바로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결과물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추진된 고려사 편찬

 

조선 건국 후 3개월 만인 139210월에 정도전, 정총 등은 태조(太祖)의 명을 받아 고려사 정리에 착수하여 13951월에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완성하였다. 아쉽게도 이 책은 현존하지 않아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정총의 서문(序文)을 통해 고려 당시에 실제 사용됐던 용어들 중 일부를 제후국의 명분에 맞게 수정하여 기록했음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폐하(陛下)’전하(殿下)’, ‘태자(太子)’세자(世子)’, 왕의 생일은 절일(節日)’에서 생일(生日)’, 왕의 명령은 ()’에서 ()’, 왕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에서 ()’로 바꿨다.

 

고려국사는 정도전이 실각한 후 태종·세종대에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태종대에는 정도전이 고려말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여 기술했다는 비난이 제기되었다. , 세종은 고려 당대의 용어를 명분에 맞추어 수정한 것은 직서(直書)’,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상과 같은 비판이 제기됨에 따라 태종·세종대에는 고려국사를 수정하여 새로운 고려사를 편찬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1424(세종 6)수교고려사(讐校高麗史), 1442년에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등이 편찬되었지만, 이들 역시 기사의 누락이 많이 발견됐고 또 서술의 공정성에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반포되지는 못했다. 이후 세종은 1449년 김종서·정인지 등에게 고려사의 편찬을 재개하도록 지시했고, 그 결과 2년 후인 1451(문종 1)에 기전체(紀傳體)고려사가 완성되었다.

 

한편, 고려사편찬을 주관했던 김종서는 문종에게 완성된 고려사를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編年體) 고려사의 편찬을 건의하여 문종의 재가를 받았다. 곧바로 편찬에 착수한 김종서는 이듬해(1452) 2월 편년체 고려사를 완성하여 문종에게 올렸는데, 그것이 바로 고려사절요이다. 이로써 조선 건국 이후 반세기동안 진통을 거듭했던 고려사 정리·편찬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역사를 통한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확보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서술 체재에서 차이가 있다. 고려사본기(本紀)’·‘열전(列傳)’·‘()’·‘연표(年表)’의 네 부문으로 나누어 사실들을 정리하는 기전체 방식을 택하였다. ‘본기는 각 왕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고려사에서는 제후국 명분에 맞도록 본기대신 세가(世家)’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열전은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기술한 전기(傳記)이고, ‘는 특정 주제에 관한 내용을 종합·정리한 일종의 분류사(分類史) 기록이다. 기전체 방식은 역사적 사실들을 상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지고 같은 기사가 중복되기도 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고려사절요는 편년체의 방식을 적용하였다. 편년체는 연··일의 시간 순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체재로서, 기사의 중복이 없고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열람에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이처럼 체재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만, 서술 원칙에서는 서로 공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모두 직서주의(直書主義)’, 즉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려 당시에 사용되었던 폐하(陛下태후(太后태자(太子절일(節日) 등의 용어에 대해, 이것이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고치지 않고 원래대로 기록하였다. 또 전거(典據) 자료들을 충실하게 인용하여 서술했으며, 자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과 편찬자의 주관적인 주장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이처럼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자들은 고려 당대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애썼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고려사고려사절요는 현재의 고려시대 연구에서 사료적 신뢰성이 매우 높은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모두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고려 후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두 책의 서문에서는 공통적으로 무인집권기와 원()간섭기 이후 권세가와 간신들이 정권을 농단하여 국정 운영이 문란해졌으며 외적의 침입과 자연재해가 빈번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태조 이성계가 등장하여 개혁을 통해 폐단을 일소하여 백성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었고, 결국에는 천명과 민심을 얻어 새나라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서술에는 조선의 건국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이며 정당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고려 말의 정치·사회적 난맥상을 고려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고려사고려사절요는 고려의 역사를 통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천명하려는 당시 지식인들의 역사 인식과 당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했던 직서주의의 원칙이 조화를 이룬 역사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