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15세기를 대표하는 학자·관료의 한 사람이다. 1439년(세종 21) 9월 문과(文科)에 급제한 신숙주는 집현전(集賢殿)에 선발되어 세종대 학술 연구와 편찬 사업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때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세조~성종대의 국정 운영 및 문물·제도 정비 사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외교는 신숙주의 탁월한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된 분야였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의 일본 사행(使行), 1452년(단종 즉)과 1455년(세조 1)의 명(明)나라 사행 등 모두 세 차례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됐고, 그때마다 외교적 현안들을 무난하게 처리하였다. 또 그는 조선으로 파견된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했으며, 다른 관직에 있을 때도 항상 예조(禮曹)의 사무를 겸직하여 외교 문제 처리를 주관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신숙주가 중국어·일본어·몽고어·여진어에 두루 능통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의 뛰어난 외교적 자질과 학식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신숙주는 세종~성종대에 외교 전문가로서 큰 공헌을 했는데, 그가 1471년(성종 2)에 왕명을 받아 편찬한『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외교 전문가 신숙주의 자질과 능력이 잘 녹아들어 있는 저술이다.
일본의 특성을 간파하는 통찰력
신숙주는 1443년에 통신사(通信使)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사행을 다녀왔다. 1443년 2월 21일에 출발하여 그 해 10월 19일에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통신사 일행은 일본 국왕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왜구에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찾아 송환했으며, 세견선(歲遣船)1)과 세사미두(歲賜米豆)2)의 수량을 규정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대마도주(對馬島主)와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1443년의 일본 사행 경험과 여러 서적에서 발췌한 일본 관련 내용들, 그리고 당시의대일(對日) 외교 규정과 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동제국’은 일본 본토를 포함한 부속 도서들과 유구(琉球, 지금의 오키나와)를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신숙주는 대일 외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동해(東海) 중에 있는 나라 중에서 일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큰 나라입니다. (중략) 그들의 습성은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을 잘 익혔고 배타기에 익숙한데,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도리에 맞게 어루만져 주면 (그들이 우리에게) 예절을 갖추어 조빙(朝聘)3)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와서 노략질을 합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국정이 문란하여 그들을 잘 어루만져 주지 못하자 그들이 연해(沿海) 지역 수천 리 땅을 침범하여 쑥밭으로 만들곤 했습니다. (『해동제국기서(海東諸國記序)』)
여기에서 신숙주는 일본이 호전적인 습성을 갖고 있어서 조선이 일본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 하면 언제든지 전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려 말 국정의 문란으로 일본에 대한 대응이 소홀해지자 왜구(倭寇)의 침입이 극성했던 사례를 제시하였다. 이어 그는 “오랑캐를 대하는 방법은 밖으로의 정벌(征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치(內治)에 있다.”라고 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내치를 안정시키는 것이 일본의 침략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사행 경험과 과거의 역사를 통해 일본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한 데서 비롯된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견문록
『해동제국기』는 첫머리에 신숙주의 서문과 범례(凡例), 지도(地圖)가 실려 있고, 본문은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국기(琉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지도에는 해동제국 전체를 그린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와 일본 본토 및 각 지역들을 그린 『일본본국도(日本本國圖)』·『일본국서해도구주도(日本國西海道九州圖)』·『일본국일기도도(日本國一岐島圖)』·『일본국대마도도(日本國對馬島圖)』 , 그리고 유구를 그린 『유구국도(琉球國圖)』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국토의 모양이나 위치 비정이 상당히 정확한, 수준 높은 지도들이다.
『일본국기』의 내용은 일본 천황과 막부(幕府) 국왕의 세계(世系), 풍속, 부산포(釜山浦)에서 일본 왕경까지 주요 지역 간의 거리, 일본의 8도(道) 66주(州)와 대마도(對馬島)·일기도(一岐島) 등의 연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8도 66주의 연혁에서 조선과의 통교(通交) 사례를 특히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조선과의 왕래가 빈번했던 서해도9주(西海道九州, 지금의 큐슈)와 대마도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또, 산양도(山陽道) 주방주(周防州)의 대내전(大內殿)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들이 백제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유구국기』의 구성은 『일본국기』와 유사하여, 국왕 세계, 국도(國都), 풍속, 부산포에서 유구 국도까지 주요 지역 간의 거리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산물로 유황이 생산되는 점, 해상무역이 발달한 점, 의복은 일본과 유사한 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빙응접기』는 당시 조일(朝日) 외교의 규정과 의례 등을 정리한 것이다. 일본에서 오는 사행선(使行船)의 수, 증명서 발급, 삼포(三浦)와 서울에서 거행하는 각종 연회, 일본 사신에 대한 물품 하사 규정, 조·일간에 체결된 여러 조약의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해동제국기』는 이후 대일 외교의 중요한 준거가 되었으며, 후대 학자들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16세기 학자 김휴(金烋)는 『해동제국기』에 대해 “사절의 왕래하는 정치 등 우리나라의 외교 규범에 있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라고 하였다. 또, 이수광(李?光)과 이익(李瀷)은 각각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일본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면서 『해동제국기』를 인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해동제국기』가 갖는 진정한 가치는 이 책이 일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조선통신사들의 필수 서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해동제국기』는 15세기에 편찬된 책이지만 조선 후기까지도 그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대일 외교의 지침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저술이며, 바로 이 점에서 저자 신숙주의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견할 수 있다.
1) 대마도주에게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
2) 해마다 대마도주에게 내리는 쌀과 콩
3) 나라 간 사신을 보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