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조선사회는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삼정 문란 등으로 인해 민생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외척(같은 본을 가진 사람 이외의 친척)의 세도정치를 일소했으며, 군제를 정비하고 사창제를 실시하는 등 재정 개혁도 꾸준히 추진하였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의 침략 위험을 절감했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군제 개편, 군사시설 확충과 경비 강화, 군기의 정비 및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개혁 추진을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지방의 실정 파악은 시급하면서도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871년에 전국 각 군현의 읍지를 편찬하도록 지시했으며, 이듬해에는 그 연장선에서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 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 지방지도』이다.
회화적으로 표현된 조선의 공간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1872년 지방지도』는 조선시대 관청에서 편찬하는 지도제작 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지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1872년 3월부터 6월까지로, 불과 4개월 정도의 짧은 시간에 전국의 모든 군현을 대상으로 지도 편찬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1872년 지방지도』는 총 461매이다. 각 군현의 지도뿐만 아니라 영·진보·목장·산성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모아서 합친 지방지도로는 분량이 가장 많다. 도별 지도 현황을 보면 경기도 40장, 충청도 52장, 전라도 84장, 경상도 106장, 강원도 28장, 황해도 42장, 평안도 85장, 함경도 24장 등이다.
『1872년 지방지도』는 ‘회화식 지도’이다. 조선후기 군현 지도는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방안 지도’로서, 방안의 한 칸을 1리, 또는 10리 등으로 상정하고 이에 맞추어 지형과 지리 정보를 담아 낸 축척지도이다. 둘째는 ‘회화식 지도’로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산천의 모습을 그린 다음 그 안에 관청·창고·도로·시장 등의 지리 정보를 표시한 지도이다. 『1872년 지방지도』는 바로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였다.
회화식 지도는 축척이 적용되지 않아 정확한 거리나 면적 등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지리 정보를 실제보다 크게 부각시켜 그림으로써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한 천연 안료를 이용해서 아름다운 색채로 산수를 표현했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도 상당히 높다. 『1872년 지방지도』의 경우 특히 전라도 지도들의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창·시장·도로 등 사회경제적 내용 대폭 수록
『1872년 군현지도』에는 각 군현에 소속된 진보·성곽·목장 등 군사 관련 시설들을 별도로 그린 지도 140장이 포함되어 있어, 군사적인 이용이 지도 편찬의 중요 목적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경기도의 강화·통진·김포·인천 등 서해안 일대의 군현지도에는 해로와 해안지역 방어의 요충지가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지역의 지도에는 병사들의 조총 훈련 강화를 위해 설치된 화포청과 포수청이 그려져 있다. 또, 대원군 집권기에 세워진 척화비의 모습도 여러 군현의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은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서약 세력의 침입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정부 주도로 지역의 군사적 준비 태세를 강화하고 서양에 대한 대응 의지를 강력히 천명했던 대원군 정권의 정책 방향을 잘 보여준다.
한편, 『1872년 지방지도』에는 사창·시장·도로 등 사회경제적 측면과 관련한 내용들이 대폭 보완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바로 사창이다. 사창은 지역사회에서 사족을 중심으로 자율적인 모금을 통해 기금을 마련해서 환곡의 기능을 대신한 제도이다. 사창은 대원군 정권의 개혁정치를 상징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로서, 대원군은 고리대로 변질된 환곡을 대신할 방안으로 사창의 실시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사창의 설치 상황을 지도에 반영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추진한 핵심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이밖에도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읍성 안의 관아 배치, 고적, 봉수, 서원, 사찰, 누정, 역, 점(숙박시설) 등이 구체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 강원도 강릉이나 전라도 무주의 지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외사고인 오대산사고와 적상산사고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사고의 관리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음을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사라진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며, 국왕이나 왕자·공주 등의 태아를 보관하는 태실도 지도에 그려져 있다. 한편, 전라도의 진도, 해남, 순천 등지의 지도에는 귀선이 그려져 있어서, 고종 대까지도 거북선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1872년 지방지도』는 고종 대 초반,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각종 정책의 성과들이 반영되어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 개항으로 급격한 사회변동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 현황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는 지도라는 점에서도 『1872년 지방지도』가 갖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