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럽과 함께하지만, 그 일부는 아닙니다. (중략)
만약 영국이 유럽과 열린 바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린 언제나 열린 바다를 선택해야 합니다.”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전 영국 총리, 1953년 5월 영국 의회 연설 중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여러분은 송년 음악 하면 어떤 곡이 떠오르나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울려 퍼지는 송년 음악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는 유럽연합(EU)의 공식 찬가이기도 합니다. ‘환희의 송가’ 가사를 한 줄로 요약하면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입니다. EU의 공식 찬가는 가사 없이 악기로만 연주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각 회원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기도 합니다. 라틴어 가사에는 ‘다양성 속의 연대는 세계 평화에 기여하리라. 그리하여 유럽은 번성하리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EU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유럽 건설을 구체화했다는 공로로 201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1956년 6개국으로 시작해 28개국까지 그 규모가 계속 확대되기만 했던 EU가 60년 만에 처음으로 축소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EU의 핵심 회원국이던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가 일어난 것입니다. 1) 1973년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에 합류한 지 47년 만의 일로, 이로써 영국은 회원국 최초로 EU를 탈퇴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2020년 1월 영국이 떠나면서 EU는 27개국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EU를 떠났을까요? 사실 영국이 EU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75년에도 탈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당을 중심으로 유럽 통합을 자본가들의 음모로 바라보는 시선과, 보수당을 중심으로 자유 무역의 이점을 중시하는 시선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이에 당시 영국 정부는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했고, 국민의 67.2%가 잔류를 선택하면서 영국은 EU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국과 EU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EU는 단일 통화인 유로화를 도입하고 궁극적으로 경제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지만, 영국은 자국 통화인 파운드화를 고수하면서 유럽의 경제적 통합에 미온적 자세를 보여 왔습니다.
1) 영국의 EU 탈퇴는 EU 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제50조에 의거한 행위임. 브렉시트(Brexit)는 영국을 뜻하는 ‘Britain’과 탈퇴를 뜻하는 ‘Exit’의 합성어임.
♦ 약 40년 만에 EU 탈퇴 문제로 또다시 국민 투표를 실시한 영국
영국의 EU 탈퇴 논쟁은 2015년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당시 영국 총리가 재집권을 위한 총선에서 EU 탈퇴 여부를 국민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공약을 내걸면서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이민자 급증에 따른 일자리 부족, 재정 악화 등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EU를 탈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면서 EU 탈퇴와 잔류를 두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재집권에 성공한 캐머런 총리는 정작 자신은 EU 탈퇴를 원치 않았기에 “영국의 미래를 위해 EU 잔류에 투표해 달라”고 호소하며 공약대로 국민 투표를 실시했는데, 이 국민 투표에서 탈퇴 51.9%, 잔류 48.1%로 브렉시트가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2)
브렉시트를 지지한 사람들은 고연령층·저학력층·저소득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역별 투표 결과를 보면, 이러한 사회적 약자층이 많은 지역에서 브렉시트 찬성 의견이 높았습니다. 이는 EU 가입 이후 혜택을 받은 층과 그렇지 못한 층이 명확히 나뉘었음을 보여 주는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EU 정서는 과거 대영 제국에 대한 향수가 짙은 고연령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65세 이상 고연령층의 투표율이 90%를 넘었기 때문에 이 연령층의 투표는 브렉시트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3) 한편 저학력층·저소득층은 EU 회원국에서 유입되는 노동력 때문에 임금이 하락하는 상황을 우려해 브렉시트에 찬성했습니다.
2) 2016년 6월 23일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영국의 EU 탈퇴가 확정됨. 이후 2020년 1월 31일에 EU를 공식 탈퇴했고, 이행 기간을 거쳐 2021년 1월 1일부터 브렉시트가 발효됨.
3) 조명진, 『브렉시트를 대비하라』, 한국경제신문사(2016)
♦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이유
브렉시트를 찬성한 사람들의 주장을 세 가지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EU 회원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증가로 영국 국민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1분기 영국 내 EU 회원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 수는 약 215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6% 증가했습니다. EU 회원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는 영국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들어선 2014년부터 매년 10% 이상 증가했습니다. EU 비회원국 출신 노동자 수가 120만 명 정도로 꾸준히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빠른 증가세였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것에 불안을 느꼈습니다. 4) 한편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처럼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는 폭넓은 복지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EU 내 거주와 이동의 자유에 따라 영국으로 유입되는 외국인들은 영국의 광범위한 복지 혜택을 누리게 되는데, 이로 인한 국가 재정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그림 1 영국 내 외국인 노동자 추이
출처: 영국 통계청, 「영국 노동시장 보고서」, 2016. 5.
그림2 영국의 EU 순수혜금 추이
출처: EU 집행위원회
둘째, 영국이 내는 EU 분담금이 수혜금보다 더 많은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EU는 각국의 국민 총소득(GNI)**을 기준으로 매년 회원국들로부터 분담금을 받아 공동체 발전을 위한 사업을 수행합니다. 영국은 농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데다, EU에 동유럽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영국의 지역들이 상대적으로 고소득 지역으로 분류되어 EU 수혜금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분담금과 수혜금의 차이인 순수혜금이 지속적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해 왔습니다. 2014년 기준으로 영국은 141억 유로의 EU 분담금을 내면서 EU 전체 분담금의 14.1%를 담당한 반면, 수혜금은 71억 유로로, EU 전체 수혜금의 5.4%를 차지했습니다. 5)
셋째, EU에서 벗어나 국가의 의사를 스스로 결정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EU에 속해 있으면 개별 국가로서 주권을 행사하기보다는 EU의 일원으로서 EU 공동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EU는 화학 물질 배출 규제, 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노동 시간 단축 권고 등 공동의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는데, 영국에서는 EU의 이러한 규제로 경제 성장이 저해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으며 국가의 사안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영국의 주권을 회복하자는 요구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4) 서울경제, 「‘EU출신 노동자 급증’ 브렉시트 최대 쟁점으로」, 2016. 5. 19.
5) 김흥종 외, 『브렉시트의 경제적 영향 분석과 한국의 대응전략』, 대외경제정책연구원(2016)
용어 정리
- *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 1942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가 영국 정부의 위촉을 받아 작성한 사회 복지 보고서인 ‘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일명 베버리지 보고서) ’ 에 포함된 표현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국가가 국민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복지 국가의 이념을 상징하는 문구로 활용됨.
- ** 국민 총소득
(Gross National Income, GNI)
- 국민들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지표임. 자국민이 국외로부터 받은 소득은 포함되는 반면 외국인에게 지급한 소득은 제외된다는 점에서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파악하는 국내 총생산(GDP)과 차이가 있음.
교육과정
- ·중학교 「사회」 세계 경제
- ·고등학교 「통합사회」 시장
- ·고등학교 「경제」 세계 시장과 교역
한편 브렉시트를 반대한 사람들은, EU에서 탈퇴하면 EU 안에서 누리고 있는 혜택이 사라져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무엇보다 EU 회원국과 무역을 할 때, 이전에는 없던 무역 장벽이 다시 생기게 되므로 영국 경제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또한 EU를 탈퇴하면 패스포팅(Passporting) 권리가 상실되어 런던이 지금까지 지켜 온 금융 허브로서의 위상을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패스포팅이란 EU 회원국 중 어느 한 국가에서만 인가를 받으면, 다른 회원국 에서도 금융 상품을 팔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패스포팅 권리가 종료되면, 영국에서 인가받아 활동하는 금융 회사들이 EU 다른 국가를 상대로 금융 상품을 팔 수 없게 됩니다. 2016년 기준으로 EU 내에서 패스포팅 권리를 이용하는 금융 회사 중 76%가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EU를 탈퇴하면 금융 회사들이 영국을 떠날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한편 현시점에서, EU 탈퇴로 EU와의 무역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는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입니다. 2020년 12월 영국과 EU가 무역협력협정(Trade and Cooperation Agreement, TCA)을 체결하고, 원산지 규정을 충족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 무관세 및 무쿼터를 적용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 브렉시트 후 혼란을 겪고 있는 영국 경제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는 어떤 모습일까요? 코로나19의 확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여러 요인이 겹치긴 했지만, 영국 국민들은 브렉시트 이후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브렉시트의 원인이 된 저임금의 외국인 노동자가 빠져나가면서 트럭 운전사의 수가 급감했고, 이에 따라 물류 운송 대란이 발생했습니다. 주유소에 기름이 공급되지 못해 사람들이 차에 기름을 넣지 못하는 상황까지 일어났습니다. 영국과 EU 국가 간 택배 배송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EU 국가의 일부 온라인 쇼핑몰은 영국으로 배송해야 하는 주문을 아예 받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림 3 영국 소비자 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 추이
출처: 영국 통계청
그림 4 OECD의 국가별 실질 국내 총생산(GDP) 성장률 전망
출처: OECD 웹사이트(www.oecd.org)
큰 폭의 물가 상승세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022년 10월에 전년 동월 대비 11.1%를 기록했고, 11월에도 10.7%로 높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물가 급등을 억제하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2021년 12월부터 기준 금리를 대폭 인상해 왔는데, 이에 따라 경기가 침체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3년 영국의 경제 성장세가 주요 7개국(G7) 6) 중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브렉시트 이후 2년이 지난 현재, 영국에는 EU 탈퇴를 후회하는 ‘브레그렛(Bregret, Brexit + Regret)’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영국의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YouGov)의 조사에 따르면, 브렉시트가 잘못되었다고 답한 응답자가 56%, 브렉시트가 옳았다고 답한 응답자가 32%로 나타났습니다. 7) 런던에서는 EU로 돌아가자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이렇게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정치적 안정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국은 2022년에만 벌써 세 번째 총리를 맞았습니다. 2022년 10월 영국 역사상 최초의 인도계 리시 수낵(Rishi Sunak) 총리가 취임했는데, 2016년 브렉시트 국민 투표 이후로는 다섯 번째 총리입니다. 신임 총리는 브렉시트 전후로 경제적 ·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새로운 영국의 미래를 제시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영국은 어떤 미래를 맞이할까요?
6) G7은 세계 경제에 영향력이 큰 7개 국가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로 구성되어 있음.
7) 이데일리, 「경제난에 빠진 영국…이젠 ‘브렉시트’ 아닌 ‘브레그렛’」,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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