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행은 2024~2025년에 걸쳐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실증사업을 실시했으며, 정부는 2025년에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율 방안을 주요 논의 안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의 제도적 도입에는 비교적 적극적인 반면, CBDC 도입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1) 이처럼 각국의 정책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가상자산, 코인, 토큰, CBDC와 같은
디지털 금융 용어들이 언론과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금융생활이 조금 더 편리해진다는 차원을 넘어, 돈이 만들어지고 이동하며 결제되는 방식, 즉
금융과 결제 시스템의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보내는 이 신호는 우리로 하여금 화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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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은 GENIUS Act(Guaranteed and Enforceable Nationally Issued U.S. Stablecoins Act)를 제정하여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연방 차원의 규율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해당 법안은 2025년 7월 미 의회를 통과하고 대통령 서명을 거쳐 법률로 확정되었습니다.
◆ 화폐는 중앙은행만이 발행하나?
디지털화폐를 논하기 전에 먼저 고전적 의미에서 화폐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화폐가 ① 교환의 매개수단(medium of exchange), ② 계산단위(unit of account), ③ 가치의 저장수단(store of value)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화폐는 ‘거래를 안정적이고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수단’입니다. 문명 초기에는 조개, 쌀, 소금, 비단과 같은
상품화폐가 사용되었고, 문명이 더욱 발달하면서 구리, 금, 은과 같은 금속으로 된 상품화폐가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금화를 중심으로 한 통화체제가 확립된 뒤, 현대 사회에서는 금본위제와 같은 태환제도*를 벗어나
법정 지급력을 가진 중앙은행 발행 화폐(대체로 불태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Bordo, 2021). 여러분이 사용하고 있는
지폐와
동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는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와 동전만 화폐로 사용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시중은행의 예금도 화폐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식당에서 체크카드로 밥값을 결제하거나, 노점에서 붕어빵을 구매하면서 휴대전화로 계좌이체를 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지폐나 동전이 오가는 일은 없습니다. 대신 내 은행 계좌에 있던 예금이 줄어들고, 상대방의 은행 계좌에 예금이 늘어납니다. 즉, 실제 거래는 현금이 아니라 은행 계좌에 기록된 예금의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
예금된 돈도 거래의 지불수단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가격을 표시하는 기준이 되고 일정 기간 가치를 저장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예금은 앞에서 언급했던 화폐의 세 가지 기능을 모두 충족하며, 이를 흔히
예금화폐 또는
예금통화라고 부릅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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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폐와 관련된 설명은 『경제로 세상 읽기』 2023년 11호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세계>를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됩니다.
3) 일반적으로 미시경제학의 맥락에서는 ‘화폐’를, 거시경제학의 맥락에서는 ‘통화’를 각각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화폐보다 통화가 더 공식용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화와 화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대상을 지칭합니다(정운찬 ·김홍범).
◆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관계
시중은행(commercial banks)은
예금창조 또는 신용창조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화폐를 만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갑이 100만 원을 들고가서 A은행에 예금하면, A은행은 100만 원을 다시 을에게 대출해 줍니다. 이때 100만 원을 모두 대출하지 않습니다. 갑이 갑자기 돈을 찾으러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은행이 10%인 10만 원을 남겨두고 90만 원을 을에게 대출해 주었다고 합시다. 을은 대출받은 90만 원을 주거래 은행인 B은행에 예금해 둡니다. 그러면 B은행은 다시 10%를 남기고 81만 원을 병에게 대출하고 병은 다시 C은행에 이를 입금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경제에 실물 돈은 100만 원이지만, 예금액은 갑의 100만 원, 을의 90만 원, 병의 81만 원을 모두 더한 271만 원입니다.
4) 앞의 예에서 예금도 거래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은행이 신용창조라는 과정을 통해 예금화폐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이자 수익을 얻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빌려주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유인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은행이 예금 인출 요구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은행의 탐욕과 집단적 인출이 결합될 때 금융 불안은 순식간에 확산될 수 있고, 실제로 이러한 문제는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 인류는 이러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지급준비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지급준비제도란
은행이 예금의 일정 비율을 현금으로 보유(시재금)하거나 중앙은행에 예치(지준예치금)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으로, 은행이 과도하게 대출을 확대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제한하는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 대출하지 않고 남겨 둔 10%의 돈이 지급준비금입니다. 이로써 은행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예금 인출 요구에 최소한의 지급 능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예금 인출이 갑자기 몰리는 경우에는, 재무적으로 건전한 은행이라 하더라도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때 중앙은행은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은행에 자금을 공급해, 지급불능 사태가 금융 시스템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중앙은행은 시중은행이 의지할 수 있는 최종적인 금융 파트너, 즉 ‘
은행의 은행’으로 불립니다. 중앙은행이 ‘은행의 은행’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개인이나 기업과 직접 예금·대출 거래를 하지 않고 오직 시중은행을 상대로만 통화를 공급하고 금융을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중앙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5)
이처럼 현대의 통화·금융 시스템은
중앙은행 통화와 시중은행 예금통화가 역할을 분담하는 이중계층(twotier) 구조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림 1] 참고).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현금과 지급준비금)는 금융 시스템의 기초가 되는 1단계 통화로서, 최종 결제 수단이자 신뢰의 기준점 역할을 합니다. 그 위에 시중은행이 예금과 대출을 통해 만들어내는 예금통화가 2단계 통화로 존재하며, 이러한 통화 시스템은 예금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 언제든지 중앙은행 통화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한국은행, 2025.11).

사실 대부분의 통화는 민간 은행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광의의 통화(M2) 규모가 GDP 대비 비중으로 볼 때 1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고, 광의의 통화의 약 90%는 민간 은행 예금의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다른 경제권에서는 그 비중이 더 높아서 유로 지역에서는 91%, 일본에서는 93%, 영국에서는 97%에 달합니다(The Economist, 2021.5.6). 우리나라의 경우 2024~2025년 사이 광의의 통화 중 본원통화(현금 + 지급준비금)의 비율은 대략 8~10% 사이였습니다.
6) 즉, 민간 통화가 약 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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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여러분이 고등학교에서 배운 무한등비급수의 합으로 전체 신용창조 금액을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5) 중앙은행의 탄생과 통화지표에 대한 설명은 『경제로 세상 읽기』 2025년 8호 <유동성을 규제하는 이유는>을 참고해 보세요.
6)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을 이용해 저자가 계산
◆ 스테이블코인 vs. CBDC
오늘날 금융 거래는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신뢰에 기반한 탄탄한 이중계층 구조를 토대로 이미
디지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그림 2] 참고). 은행과 중앙은행 간의 자금 결제는 오래전부터 전산 시스템을 통해 처리되어 왔고, 은행과 기업·가계 간의 거래 역시 계좌이체, 카드 결제, 모바일 결제 등 디지털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다시 디지털화폐를 발행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얼핏 중복된 시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중앙은행들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현금 사용이 감소하는 환경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 지급수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안전한 결제 수단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결제 시스템의 효율성과 포용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입니다(한국은행, 2025.11). 이러한 문제의식은 실험 단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바하마는 2020년 세계 최초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인 ‘샌드달러(Sand Dollar)’를 발행하며, 디지털 환경에서 공공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실제로 시험했습니다(The Economist, 2021.5.6).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이유만으로 최근 중앙은행들의 긴박한 움직임을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어쩌면
스테이블코인이 던진 도전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와 같은 법정통화나 국채 등 안전자산에 가치를 연동해,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디지털 토큰입니다. 비트코인과 같은 기존 가상자산과 달리, 안정성을 무기로 결제와 송금에 실제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우며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의 매력은 분명합니다. 블록체인 기반의 결제는 빠르고, 국경을 넘는 거래에서도 비용이 낮습니다. 기존 국제결제 시스템이 느리고 비싸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테이블코인은 현실적인 불편을 해결해 주는 대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거래의 결제 수단을 넘어,
상거래 결제와 송금 영역으로까지 사용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중앙은행의 우려가 시작됩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은행 예금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예금보험이나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과 같은 전통적인 안전망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준비자산의 건전성에 대한 작은 의심만으로도 대규모 환매 요구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금융 불안으로 빠르게 전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은 머니마켓펀드(MMF)처럼 안전해 보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코인런’에 취약하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왔습니다(The Economist, 2025.9.29). 또한 스테이블코인이 은행 예금을 대체해 확산될 경우, 은행의 자금 조달 기반이 약화되고 금융 중개 기능이 훼손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통화 정책의 전달 경로를 약화시키고, 중앙은행이 금융 시스템 전반을 관리하는 데 새로운 공백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The Economist, 2021.5.6). 중앙은행의 통제와 최종대부자 기능 밖에 있는 민간 디지털 토큰이 통화 시스템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이동할 가능성은, 중앙은행 입장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도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CBDC는 스테이블코인이 제기한 위험에 대해 중앙은행이 제도적으로 대응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CBDC가 만능 해법인 것도 아닙니다. CBDC가 발행되면 지금의 지폐와 동전이 디지털로 바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이나 기업이 중앙은행에 계좌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될 경우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은 개인에게 예금을 예치하는 경쟁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지급결제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직접 발행할 경우, 사생활 보호 문제, 은행의 중개 기능 약화, 위기 시 ‘디지털 뱅크런’ 가능성 등 새로운 위험이 함께 등장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중앙은행은 CBDC 도입에 대해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설계 방식과 도입 범위를 둘러싼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The Economist, 2023.6.8).
이 지점에서 다시 매우 중요한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
혁신은 본래 민간에서 발생하는데, 왜 중앙은행이 결제 시스템의 중심에 다시 서려 하는가’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의 주장은 생각해 볼 만합니다(Jean Tirole, The Economist, 2025.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