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7일. 날이 좀 더웠습니다. 12월인데 그랬습니다. 왜일까요? 그날 밤 블로그에 올린 제 글에 답이 있습니다.
“내 나이 서른 셋. 난생처음 내 인생의 원심력이 구심력을 이겨냈고 난 이곳 이역만리 남미 대륙에 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형언할 수 없는 절경과 가늠할 수 없는 역사의 한복판을 종단하고 있다. 3개월이 흘렀다. 6개월 일정의 딱 반을 지나왔다. 며칠 후면 난 잉카제국의 공중도시 마추픽추에 오를 것이고 또 며칠 뒤면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로 해변가에서 흥겨운 삼바 리듬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바에서 6개월 라틴 여행의 마지막 밤을 자축하게 될 것이다. 자, 내 입으로 얘기해 놓고도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꿈의 여정을 실제로 밟아 나가는 지금, 나는 어떠한가? 행복한가? 내 위태롭던 미래는 이제 믿음직스러운가?”
처음 경험한 남반구의 더운 겨울. 페루 리마의 한 민박집에서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키보드 두드리던 그날 밤. 스스로에게 물음표 몇 개를 연달아 던진 위의 글 뒤에 이어지는 문단은 이렇습니다.
“언젠가부터 모든 게 심드렁해졌다. 집에 가고 싶었고 다시 일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문득, 아니 실은 일부러, 처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던 ‘그때’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내일 새벽 6시 버스를 타고 떠나야 하는데,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이 긴 글을 써대고 있는 것이다. 매너리즘을 피해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이 또 다른 매너리즘이 되어버린 지금, 난 앞으로 남은 3개월을 계획하기보다 지나온 3개월을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잠시 글쓰기를 멈춘 걸로 저는 기억합니다. ‘여행’도 반복되면 ‘일상’이 되고 만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던 제가, ‘처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던 그때’를 잠시 돌이켜 보았던 겁니다. 직장 그만 두고 가진 돈 탈탈 털어 겁도 없이 배낭여행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때. 간다면 꼭, 필히, 반드시 남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 그러니까 2004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혼자 극장에 앉아 한 편의 영화 속으로 완벽하게 빨려들던 ‘그때’를 찬찬히 되돌아보았습니다.
<중앙역>의 월터 살레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였습니다. 제목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아직 혁명가 ‘체 게바라’가 되기 전,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 실제 이야기죠. 처음엔 4개월 동안 무작정 8천km를 달리는 계획이었어요. 여행수단은 1939년형 낡은 모터싸이클 ‘노턴 500’ 모델. 애칭은 ‘포데로사(힘 있는 자)’. 통통하고 능글맞은 29살 생화학도 알베르토 그라나도(로드리고 데 라 세르나 분)가 포데로사를 운전합니다. 그리고 취미로 럭비를 하지만 가끔 천식으로 고생하는 23살 의학도 에르네스토 게바라 델라 세르나(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분)가 뒷자리에 앉습니다. 1952년 1월 4일. 걱정하는 가족들을 뒤로한 채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위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
시작부터 고난입니다. 텐트는 바람에 날아가고 천식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토바이는 곧 고장 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길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책에서만 보던 남미 대륙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들만의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써내려가죠. 안데스 산맥의 좁은 길이 그들을 더 넓은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4개월을 예상한 여정이 결국 8개월을 채우고서야 끝이 납니다.
페루는 특히 잊지 못할 여행지였습니다. 사라진 잉카 문명의 중심, 해발 2,430m에 자리 잡은 공중도시 마추픽추에 오른 날. 천문학, 뇌수술, 수학에 능통했지만 단지 화약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허망하게 무너진 고대 문명의 주춧돌에 주저앉아 에르네스토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어머니, 어떻게 한번도 보지 못한 세상이 이렇게 그리울 수 있을까요?”
아마 그 대사였을 겁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세상’을 저 또한 그리워하게 만든 것이. 에르네스토가 ‘남미의 잊힌 과거’를 그리워했다면, 저는 ‘남미의 생생한 현재’를 그리워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거친 환경과 고산병, 살인적인 더위와 고된 일정에 지친 나머지 ‘여길 왜 왔을까.’ 하고 후회도 했지만, 그래서 여행 3개월 만에 페루 리마의 민박집에 주저앉아 여행의 피로를 하소연하며 블로그에 투덜대기도 했지만, 그날 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처음 보던 ‘그때’의 감격을 다시 떠올린 덕분에 다시 힘을 내 여행을 이어갔고, 기어이 마추픽추에도 올랐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리우 데 자네이로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게 됩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꿈과 열망으로 한동안 나란히 달려갔던 두 사람의 이야기다. 이번 여행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날 변하게 만들었다.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채운 체 게바라의 이 내레이션과 달리 저의 남미 여행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저를 변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금세 ‘예전의 나’로 돌아왔고, 여행에서 느낀 감흥도 빠르게 흐릿해지고 말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시절에 부린 찰나의 객기라 할지라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구 반대편 남미에서 보낸 한철이라니. 그 6개월이 그래도 참 멋진 시간이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재간이 없지 않을까요?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서 중간에 오토바이가 고장나는 장면. 걸어서 남미를 여행하는 건 너무 힘들 테니까 알베르토가 슬쩍 물어보는 순간. “계속 가야 할까?” 그때 에르네스토의 대답. “당연하지. 계속 가야 해. 서른 살은 한 번뿐이니까.”
맞습니다. 모든 게 한 번뿐입니다. 딱 한 번뿐인 서른세 살의 6개월을 저는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잠시나마 ‘예전의 내가 아닌 나’로 낯선 대륙을 떠돌았습니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감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 비현실적인 풍경의 일부가 된 내 자신에게 감탄하는 ‘여행자’로 보낸 시간이, 짧게나마 제 인생에 있었다는 게 뿌듯한 겁니다. 인생은 결국, 그런 한줌의 뿌듯함에 의지해서 산더미 같은 비루함을 견디어내는 여정일 테니까요.
10년 전 저의 등을 떠밀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게 해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비록 ‘극장 재개봉’은 아니지만 7월 2일부터 IPTV, 디지털 케이블, 인터넷, 모바일 등의 플랫폼 서비스로 새롭게 선보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도 머지않아 자신만의 ‘여행일기’를 쓸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 무모한 도전을 미리 큰소리로 응원하면서, 처음에 인용했던 제 부끄러운 글의 제일 마지막 문단을 옮겨 봅니다. 아, 또 여행가고 싶네요.
“언젠가 들은 얘기다. 잭 런던이라는 소설가가 이런 말을 했단다. ‘재미없고 지루한 지구보다는 멋진 유성이 되고 싶다.’고. 그가 실제로 유성처럼 살다 갔는지 지루한 지구로 생을 마감했는지 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난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찰나의 유성으로 지구를 활공한 이 시기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흰 양떼 가운데 한 점 검은 양으로 존재했던 짧은 시기를 평생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또다시 뻔한 자기 최면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수밖에. 앞으로도 열심히 비포장 고갯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수밖에. 내 지루한 넋두리는 여기까지. 우리는 내일 피스코(Pisco)로 간다. 2005년 12월 7일. 페루 리마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