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리(뱅상 랭동 분)는 화가 납니다. “건설 분야 경험이 없으면 크레인 기사로 고용할 수 없다.”는 업체의 말에 화가 납니다. 애초에 ‘해당 분야 유경험자만 가능’하다고 말해주지 않은 교육 기관에도 화가 납니다. 취업도 할 수 없는 취업교육을 이수하느라 밤낮으로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더 화가 납니다. 가장 화가 나는 건, 이 나이에 자격증 하나 따겠다고 쩔쩔매는 자신입니다. 평생 몸담은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스스로에게 제일 화가 납니다.
동료들은 끝까지 싸우자고 합니다. ‘경영상 필요’에 의한 정리해고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합니다. 흑자를 기록한 회사가 겉으론 적자인 척, 직원들을 부당하게 내쫓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좀 더 힘을 내자고도 말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버텨온 세월이 벌써 2년입니다. “그만할 때도 됐잖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이젠 인정해야지.” 티에리의 말에 언성을 높이는 동료들. 덩달아 목소리가 커지는 티에리. “비겁하다고 말해도 할 수 없어. 이젠 그만하고 싶어. 난 지쳤어.” ‘실업자’의 굴레를 쓴 그에게 ‘배신자’의 낙인까지 찍히는 순간, 함께 땀 흘리고 함께 쫓겨나고 함께 투쟁하던 동료들과 그렇게 갈라섭니다. 내일의 정의를 위해 계속 싸우기를 포기하고, 당장 오늘의 밥상을 위해 다시 구직활동에 나섭니다.
배신자로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일자리를 찾는 티에리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는 게 영화 <아버지의 초상>의 전반부입니다. 무표정한 얼굴과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번번이 면접에서 퇴짜를 맞는 게 티에리의 일상입니다. 더 이상 대출도 받을 수 없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을 내놓아야 하는 게 티에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아버지가 맞닥뜨린 매일의 일상이자 눈앞의 현실이기도 할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법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건, 아마 우리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티에리의 지치고 곤혹스러운 얼굴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마주치는, 당신 본인의 주름진 얼굴을 꼭 닮았습니다. 끝까지 인정하기 싫은, 하지만 결국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말하자면, 흔한 패배자의 얼굴.
그랬던 티에리가 드디어 새 직장을 잡았을 때 관객도 함께 안도하게 됩니다. 대형마트 보안요원으로 새 출발하는 그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말쑥한 양복을 차려 입고 입구에 서서 고객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는 일, 거칠고 위험한 건설현장에 비하면 훨씬 괜찮은 직장처럼 보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행히 힘쓸 일이 적은 자리를 찾았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게 볼 일만도 아니라는 게 영화 <아버지의 초상>이 준비한 후반부입니다.
티에리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매장 내 감시카메라를 통해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겁니다. 계산하지 않은 물건을 몰래 숨겨 나가는 손님을 찾아냅니다. 고객이 쌓아야 할 포인트를 자신의 카드에 슬쩍 적립하는 직원을 찾아냅니다. 쫓아가고 잡아내고 추궁하고 돌려받는 일, 물건값을 치르지 않겠다고 버티면 기어이 죗값을 치르게 만드는 일, 대부분 가난한 자들을 윽박지르는 일, 때로는 함께 일하는 동료마저 궁지에 모는 일, 그것 참, 미안하고 고약한 일.
자, 그래서 티에리는 다시 지쳐갑니다. 다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짓밟아야 비로소 나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벼랑 끝에서 기어 나오기 위해 남을 벼랑 끝에 세워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렵게 잡은 직장이니 꾹 참고 일해야 할까요? 아니면 마지막 인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빨리 그만두어야 할까요?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자유가 있기는 한 걸까요?
스테판 브리제 감독은 주인공 티에리를 제외한 나머지 배역을 모두 비전문배우에게 맡겼습니다. 티에리의 가족, 직장동료, 마트의 손님들까지도 모두 연기 한 번 해본 적 없는 일반인입니다. 촬영은 다큐멘터리 전문 촬영감독에게 맡겼습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실제 공간을 찾아다니며 찍었습니다. 그는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그저 영화만 보고 가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지어낸 이야기지만 그래도 단지 지어낸 이야기로만 치부되는 게 싫었습니다.
“단 하나의 거짓말을 믿게 하려면 먼저 아홉 개의 진실을 이야기하라.” 소설가 안정효의 유명한 ‘글쓰기 비법 강의’를 감독도 들었던 걸까요? 촬영, 캐스팅, 로케이션 등 그가 정성껏 담아낸 아홉 개의 진실 덕분에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감독이 준비한 그 단 하나의 거짓말에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그 거짓말이 부디 열 번째 진실로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영화 <아버지의 초상>은 이른바 ‘팔꿈치 사회’의 풍경을 세밀화로 그려냅니다. ‘팔꿈치로 옆 사람을 내쳐야지만 생존이 보장되는 치열한 경쟁 사회’를 가리키는 말, 다른 이의 팔꿈치에 밀려난 티에리가 이제는 다른 사람을 팔꿈치로 밀어내는 현실,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은 우리 시대의 익숙한 작동원리, 이 냉혹한 시대의 최전선에 선 ‘아버지의 초상’이 바로 티에리입니다. 이 영화로 지난해 깐느국제영화제 남자연기상을 받은 배우 뱅상 랭동의 얼굴을 저는 감히 우리 시대 모든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차마 가족 앞에선 드러낼 수 없어 무표정한 얼굴 뒤에 필사적으로 감춘, 티에리의 그 수많은 표정을 상상하며 저는 시인 김현승의 이 표현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김현승 시, <아버지의 마음> 중)
프랑스는 먼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초상>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뱅상 랭동은 자주 보는 배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티에리를 거리에서, 회사에서, 식당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자주 마주친 것만 같습니다. 꼭 제가 아는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영화라는 게 참 신기하죠? 그래서 저는 계속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아버지의 초상>을 편들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