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밭은 황량하다. 땅은 얼어 있고, 뽑지 않은 고춧대와 가짓대는 처참하게 무너져 있다. 깡마른 수세미가 덩굴에 매달려 바람에 딸깍딸깍 소리를 낸다. 늦가을에 싹을 틔운 민들레도 추위에 스러져 있다. 대개 일년 내 내 아무 때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서양 민들레다. 그러고 보니 겨울 밭에선 할 일이 거의 없다. 주말농장을 일구면서 비닐집을 지어 겨울 농사까지 짓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 밭에선 늦가을에 밭 한쪽을 일궈 마늘을 심었다. 흙으로 덮고, 왕겨를 덮어놓았는데 아직 싹은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지난해 벼농사를 함께 지은 아이들은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로 시작해 ‘동지’로 끝나는 24절기를 가사로 해서 만든 노래를 먼저 입맞춰 부르고 일을 시작했다. 흩어져 있다가 다시 모일 때도 그랬다. 농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업이던 시대 사람들에겐 어른이 된다는 것은 ‘철(계절)을 아는 것’, 생각에 ‘철이 드는 것’이었다. 올해는 2월 19일이 우수였고, 3월 5일이 경칩이다. 눈이 녹아 비가 되는 때가 우수이니,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가고 봄비에 초목에는 싹이 트기 시작한다.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때가 경칩이니, 바야흐로 뭇 생명들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올해 농장에서 가장 먼저 시작할 일은 씨감자 심기다. 감자는 춘분에 심어 하지에 거둔다. 물론 고랭지에서는 가을 감자도 재배한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감자가 유럽에 들어간 것은 1570년경이며,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된 것은 200년이 더 지나서였다. ‘성서에 나오지 않는’, ‘시커먼 땅 속에서 자라는 식물’을 재배하기를 꺼린 탓이다. 막상 감자를 심어 수확하기 시작하자 아일랜드에선 그덕에 인구가 몇 배나 늘어났다. 그 뒤 감자마름병이 번지면서 대기근을 겪고 케네디의 선조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아픈 역사도 있다. 우리나라엔 19세기 초반~중반 무렵 청나라를 통해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잘 자라고 수확량도 많아 많은 이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다. 나도 어릴 적 하지 감자와 고구마를 참 많이 먹었다. 다행히 아직 물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저장해둔 감자가 싹튼 것을 2~4조각으로 쪼개, 재를 묻혀 씨감자로 썼다. 요즘은 씨감자를 사서 쓴다. 집에서 먹는 감자가 싹이 텄다고 씨감자로 쓰면 수확 때 실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씨감자를 심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감자가 ‘덩이줄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땅 위로 나와 있는 감자 줄기에 흙을 덮어줘야 줄기가 감자로 변한다. 또 땅 속의 덩이줄기가 커지면 땅이 벌어지고 덩이가 땅 위로 고개를 내밀게 된 다. 감자는 햇빛을 보면 녹색으로 변하고, 거기에 솔라닌이라는 독소가 생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땅위줄기가 땅과 만나는 부분에 흙을 덧씌우는 북주기를 몇 차례 해줘야 한다. 북주기를 쉽게 할 수 있게 씨감자를 심을 때 덮은 흙이 밭표면보다 조금 움푹 들어가게 해두는 게 좋다. 감자를 심은 곳 옆에 북주기용 흙을 미리 쌓아두는 것도 좋다.
감자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수확하는 것이 좋다. 비가 오면 땅이 질퍽해져서 감자에 흙덩이가 달라붙어 여러모로 불편해진다. 아이들과 농사를 지을 때 가장 많은 탄성을 듣는 때가 감자나 고구마를 수확할 때다. 씨감자 하나, 고구마 어린줄기 하나 심었을 뿐인데, 땅 속에 그 많은 것이 숨어 있다는 걸 발견할 때의 신기함 때문일 것이다. 호미를 든 아이들의 탄성을 듣고 싶다면 춘분에 씨감자를 심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