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가 겪었다는 이야기다. 여느 날처럼 오후 4, 5시쯤 어린이집에서 아들을 찾은 아내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예매한 티켓을 출력하기 위해 자동발권기 앞에 섰고, 순서가 되자 아내는 호기심 많은 아들 녀석이 잘 볼 수 있도록 오른팔로 들어 안고선 왼손으로 기기를 조작하는 중이었다. 그때 아들 오른쪽 옆으로 누군가가 훅 다가왔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람들로, 적지 않은 나이의 남녀 커플이었다고 한다.
차라리 끼어들기였다면 나았을지 모른다. 새치기도 아닌 것이, 이들은 아들 옆으로 바짝 붙어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그들이 적지 않게 불편했던 것 같다. 단말기와 1m가량 떨어진 바닥에 그어진 ‘고객대기선’을 넘어, 아내 말처럼 ‘어깨 뒤에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면 내가 그 상황이었어도 좀 황당했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 상황에 대처하는 아내의 태도는 이 아빠의 바람과 달랐다. 재빨리 티켓만 뽑아서 자리를 떴으면 좋았을 것을, 아내는 그들에게 눈 레이저를 쏘았고, 그들이 그 레이저에 반응하지 않자 재차 시선을 주면서 ‘한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죄송한데, 지금 우리가 표를 뽑는 중이고, 대기선 은 저 뒤에 있어요.”
어느 정도의 톤과 속도, 볼륨, 어투로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내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아내 증언에서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아무리 경우가 없었다손 치더라도 길거리나 다름없는 곳에서, 어린아이를 대동한 채 낯선 어른과 각을 세웠다는 대목에서는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 이 아줌마가 간도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론 내지 못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 엷은 배려에 더욱 격한 반응을 보이는 아내 모습을 종종 목격하고 있는 터였다.
“애나 잘 키워!” 진짜 사건은 뒤에 벌어졌다. 팝콘을 사들고 상영관 입구로 옮겨가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이런 소리가 들리더라는 거였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아까 그 커플이 있었고, 그들은 그 말을 남기고 다른 상영관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그 커플은 물론 아내와 아들에게도 쏠렸을 주변의 적잖은 시선들을 감안하면 아내는 일종의 봉변을 당한 셈이다. 그들이 여기에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진 데 대해 아내는 적잖은 아쉬움을 보였다.
“자기들 잘못은 인정할 줄 모르고…. 그 사람들 도대체 왜 그래?” “왜 얌전히 있는 남의 아들을 걸고 넘어져?” “당신이 옆에 같이 있었어도 그 사람들 우리한테 그랬을까?” 일단 들어주는 것이 상책이리라. 아내의 화는 그날 밤늦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반복됐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동물본능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를 다시금 확인했으며, 이런 정글 같은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암울한 전망도 내놓았다.
이야길 들으면서 추임새도 넣고 비난도 함께 했지만 그 상대를 다시 볼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 낼수록 화가 자가발전돼 우리의 평정을 더욱 해치는 형국이었다. 빨리 잊는 게 상책이라고 위로했지만 아내는 이 대목에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최근 횡단보도에서 한 아이 엄마가 담배 피는 남성에게 담뱃불을 꺼달라고 이야기를 했다가 뺨을 맞는 일이 있었는데, 그 아기 아빠가 옆에 있었다면 그 흡연자의 태도가 그렇게 막무가내이지는 않았으리란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없었을 뿐 똑같은 사건이고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이 같은 폭행은 도처에 널렸다는 것이다.
며칠 뒤 아내는 퇴근길에 극장에 들러 대기선이 보다 더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이유와 함께 나름의 아이디어를 직원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아들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정의감 아닌 정의감을 불태우며 바깥세상과 각을 세우다가도 접점을 찾아가는 세상 엄마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