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 인도네시아에 다녀왔다. 인도네시아의 명문대인 가자마다대의 초청으로 디지털이코노미 세미나에서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발표를 하고 온 것이다. 이 기회를 빌려 인구 2억6천만명의 세계 4위 인구대국인 인도네시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또 스타트업 업계 분위기는 어떤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왔다. 내가 느낀 몇 가지 포인트다.
핀테크(fintech)가 뜨겁다. 가서 보니 가자마다대 세미나의 메인주제는 핀테크였다. 행사의 스폰서도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인 뱅크인도네시아였다. 부행장까지 왔다. 인도네시아는 은행계좌를 가진 국민이 전체의 36% 정도밖에 안 되고 신용카드 보급률도 6% 정도밖에 안 된다. 국토 내에 1만7천개의 섬이 있어 금융인프라를 구석구석까지 확충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 나라에서 핀테크는 모바일을 이용해 금융인프라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구세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OJK(인도네시아 금융당국)와 뱅크인도네시아가 경쟁적으로 핀테크 규제완화에 나서고 조코위 대통령은 “더 많은 국민들이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핀테크에 참여해야 한다.”고 기업들에 강조할 정도다.
이커머스(e-commerce)가 뜨겁다. 인도네시아의 이커머스, 즉 온라인쇼핑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르게 중산층이 떠오르고 있는 이 거대시장을 잡기 위해 글로벌업체들과 로컬 스타트업이 혼전을 벌이고 있다. 로컬 스타트업에도 글로벌자본들이 수천억원의 군자금을 대주고 있기 때문에 볼 만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등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라자다(Lazada)’다. 독일의 로켓인터넷이 2012년 동남아 이커머스마켓을 노리고 만든 이 회사에는 그동안 약 7천억원가량의 자금이 투자됐다. 동남아의 ‘쿠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사를 지난 4월 중국의 알리바바가 약 10억달러(1조1천억원)를 들여 인수했다. 2위를 놓고 소프트뱅크와 실리콘밸리의 세콰이어캐피탈이 투자한 오픈마켓 ‘토코피디아’, SK플래닛이 현지에 진출해 만든 인도네시아판 11번가 ‘일레브니아’ 등이 치열한 경쟁 중이다. 길거리와 TV에는 이들 회사의 광고가 곳곳에 보인다. 현지에서 만난 월드와이드로지스틱스 박상훈 대표는 “돈을 버는 회사가 아직 하나도 없다.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모두 마케팅에 돈을 쏟아붓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고젝(Go-Jek)’도 놀랍다. 자카르타 시내는 세계최고의 교통체증으로 유명하다. 길게 늘어선 차량 사이를 오토바이들이 누비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온통 녹색 재킷을 입고 녹색 헬멧을 쓰고 있다. 헬멧에는 고젝이라고 써 있다. 고젝은 인도네시아의 오토바이판 우버다. 스마트폰 앱으로 오토바이 기사를 불러 원하는 곳으로 타고 갈 수 있다. 고젝은 2010년 20대의 오토바이로 시작해 지금은 20만명의 기사가 참여하고 있고 지난 8월에는 약 1조4,5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약 6천억원을 투자받았다. 이 회사는 20만명의 고젝네트워크를 통해 스마트폰 앱으로 주문하면 음식도 배달해주고, 쇼핑도 대신해주고 집 청소도 해주는 등 10여가지 서비스를 내놓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민스타트업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지금은 비슷한 녹색 재킷과 헬멧을 쓴 말레이시아 스타트업 ‘그랩(Grab)’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가자마다대 학장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1945년 같은 해에 독립했다. 그런데 이후 한국경제는 대약진(leapfrogging)을 해 저만치 앞서갔고 인도네시아는 주저앉아 있다. 이제는 우리 인도네시아도 약진할 차례다. 스타트업을 키우는 노하우를 알려달라.” 굳이 노하우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엄청난 인구와 잠재력을 가진 인도네시아가 디지털경제에 눈을 뜨고 있다. 수십년 뒤면 인도네시아가 모바일인프라를 지렛대 삼아 대약진해 우리나라를 앞질러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IT강국이라는 허명에 취해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