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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남구 기자의 도시농부배추벌레와 지렁이의 공생
정남구 한겨레 논설위원 2016년 10월호




우리 밭 앞엔 논이 있다. 여름 내 백로가 와서 놀더니 절기가 백로(白露)를 지나자 벼가 누렇게 익었다. 밭 한 켠엔 게을러 제때 따지 못한 오이가 노각이 돼 매달려 있다. 개똥참외도 풀섶에 홀로 익어 있다. 가을 색깔을 하나만 고르라 한다면 나는 노랑을 꼽겠다. 밭두렁에 키 큰 해바라기 꽃은 아직 황금색인데 뜨겁게 여름 햇살을 빨아들인 씨앗이 여물어 쏟아지고 있다. 저마다 남쪽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인 씨방 아래 대궁에도 노랑 물이 들고 있다.


저항하기라도 하듯 우리는 또 가을 농사를 짓는다. 이번에는 김장에 집중한다. 8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구획을 지은 개인밭에 배추를 따로 심고 공동으로 이용하는 밭에 무, 총각무, 쪽파, 갓을 심었다. 생강은 늦봄에 심어뒀고 내년에 수확할 마늘을 심을까 말까 궁리를 한다. 옆밭을 일구는 할머니는 검은 비닐로 멀칭(mulching;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땅을 짚이나 비닐 따위로 덮는 일)을 하고 구멍을 뚫고 배추를 심었다. 우리 밭에선 비닐을 쓰지 않기로 한 까닭에, 나는 풀을 베어 멀칭을 하고 풀 사이를 헤집고 배추 모종을 심었다. 함께 농사짓는 회원들은 멀칭을 하지 않았다가 늦게야 풀 멀칭을 했다.


세 곳을 비교해보면 성장 속도에 차이가 꽤 난다. 2주 앞서심은 할머니 밭 배추는 잎이 벌써 무성하게 자랐고 곧 결구를 짓기 시작할 것 같다. 우리 농장에선 우리 밭 배추가 가장 빨리 자라고 있다. 만날 때마다 나한테 “밤에 와서 몰래 비료를 주고 가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한다. 멀칭은 모종을 옮겨 심은 뒤 땅에 수분이 유지되게 도와줘 활착과 초기 생육을 돕는다. 또 풀이 자라는 것을 막아주고 다른 병해를 막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비닐은 걷어내는 과정에서 흙 속에 남을 수 있지만 풀을 이용한 멀칭은 걷어낼 필요가 없고, 풀이 썩어 거름이 되는 장점이 있다. 풀 멀칭을 한 우리 밭에선 메꽃이 적잖이 싹을 틔우긴 했지만 크게 자라진 않아서 애써 김매기를 할 필요가 없는 정도였다.


질소 비료를 쓰지 않고 배추를 크게 키우기란 쉽지 않다. 배추는 결구가 작으면 김치를 담글 때 영 색깔과 모양이 나지 않는다. 지난해엔 퇴비거름만 넣은 밭에 30포기가량 심었는데 제법 속이 찬 배추는 절반가량이었다. 올해도 밑거름으론 유박(깻묵)으로 만든 비료만 썼는데 절반만 건지겠다는 각오를 한다. 칼슘이 부족하면 생육장애가 오니 계란껍질에 식초를 부어 난각칼슘을 만들어 써야 할지도 모른다. 오줌으로 만든 액비도 구해 써야 할 것 같다. 씨를 뿌리고 김매기를 하고 몇 번 솎아주기만 하면 되는 무 농사에 비해 배추 농사는 꽤 손이 가고 신경도 쓰인다.


배추벌레와의 전쟁도 조만간 시작될 것이다. 밭에 올 때마다 일일이 손으로 잡아주지 않으면 배추가 아니라 배추벌레를 키운 꼴이 된다. 비닐 멀칭을 하고 질소 비료와 농약을 살짝만 쓰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궁상을 떠느냐며 어머니는 웃으신다. 하지만 우리 식으로 몇 해 농사를 짓다보면 흙 속에 지렁이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냥 그게 좋다. 농장에 오는 아이들은 지렁이를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화분에서 키워봐도 좋냐고 묻는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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